“하나님을 기뻐하는 교회"
함께 묵상합시다.
“익사(溺死)하는 물고기 없고, 추락(墜落)하는 새 없다.”(1)
오래전 존경하는 교수님의 글이 ‘복음과 상황’이라는 책에 실린 적이 있습니다. 그 한 줄의 글은 기독교 복음을 너무나도 잘 설명하고 있었습니다. 물고기가 물에 빠져 죽거나, 새가 추락하는 법은 없습니다.
우리들 중에는 가끔씩 “그것도 믿음이냐?” 또는 “그렇게 믿어서 천국 가겠느냐?” 혹은 자신 스스로 “내가 지금 이렇게 살면서도 구원 받을 수 있을까?” 라는 질문을 심각하게 가지고 있는 분들이 있습니다.
은혜 안에 살면서도 율법을 걱정하고, 생명 안에 살면서도 죽음을 걱정하는 이 모순 된 논리는 참으로 슬픈 현실입니다.
은혜 안에 살면서 율법을 걱정한다는 것은, 율법을 범하고 지키지 못함으로 인해서 자신이 얻은 구원을 잃어버릴까 불안해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생명 안에 살면서도 죽음을 걱정한다는 것은 이미 천국을 소유하고 있으면서도 영원한 지옥의 형벌을 받을까 걱정하는 것입니다.
율법을 지키지 말라는 것도 아니요, 육신의 죽음이 없다는 것도 아닙니다. 율법을 지키는 것은 구원 받은 성도로서 마땅히, 기쁨으로 또 기꺼이 지켜나가야 하는 당연한 것입니다.
믿음도 선물이요, 구원도 선물이요, 영원한 생명도 선물이건만 이것을 잃어버릴까봐 염려하며 불안해하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아이와 같이 아직 미숙할 수는 있지만, 죽은 자는 아닙니다. 우리가 매일 매일 완벽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책망을 받을 수는 있지만, 우리가 영원한 지옥의 형벌에 던져지지는 않습니다.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이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어떤 신앙의 행위들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익사(溺死)하는 물고기 없고, 추락(墜落)하는 새 없다.”(2)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자신들이 얻은 구원을 잃어버리지 않고 유지해 나가기 위해서는 지속적인 신앙의 행위들이 따라와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러한 생각들은 근본적으로 구원의 조건이 자신들에게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고 살아도 구원이 취소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때때로 심각한 죄를 저지르거나, 삶의 치명적인 어려운 문제들로 인해 기도와 예배의 자리를 떠나게 될 때 “내가 과연 천국에 갈 수 있을까?”라는 근본적이고 심각한 고민과 절망에 빠지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예배와, 기도, 헌금, 구제와 봉사는 모두가 소중한 신앙의 내용들이지만, 그 무엇도 구원의 조건이 될 수는 없습니다. 구원의 조건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신실하심’입니다.
무엇을 팔아 바쳐야 한다든가, 어떤 열심을 부려야 얻을 수 있고, 유지되는 구원이라면 그것은 가짜입니다.
하지만 ‘구원은 하나님의 값없이 주시는 선물’ 이라는 은혜를 핑계로 절제 없는 불경건의 삶을 살고 있다면, 그는 구원의 깊고 풍성함을 알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취소되지 않는 하나님의 구원을 이용해서 방종의 삶을 살고 있다면 30년, 40년 아니, 일평생 신앙생활을 했어도 여전히 유치한 어린아이일 수 밖에 없습니다. 또한, 익사하지 않고, 추락하지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멈춰 있다면 그는 생명 있음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생명이 없는 것은 부초처럼 흐르는 물에 떠내려가지만, 생명 있는 것은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생명을 소유한 자답게 사십시오. 세상의 유혹과 물결에 여러분의 생명과 영혼을 맡기지 마십시오.
“그대, 하나님 보다 의로워지려는가?"
이 세상을 살다보면, 그냥 두고 보기 힘든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꼴불견’인 일들도 있습니다. 때로는 ‘기가 막힌' 일들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많은 일들 중에서도 우리가 그냥 넘어가기 힘든 일은 아마도 ‘악한 사람들이 잘 되는 것’일 겁니다.
성경에 보면 ‘요나’라는 선지자가 자신의 나라와는 원수지간인 앗수르 나라의 수도 니느웨 성읍에 “심판과 회개를 선포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받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는 이 일이 싫어서 ‘다시스’라는 먼 곳으로 하나님을 피해서 배를 타고 도망을 갑니다.
요나 선지자는 자신의 나라 이스라엘과 백성들을 침략하고 많은 고통을 준 니느웨가 망해야 그동안 자신들이 당했던 억울함이 어느 정도 보상된다고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악한 그들이 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요, 그것이 ‘정의’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그래야 이 땅에서 '하나님의 명예'가 지켜질 것이라고 생각했는지도 모릅니다.
도망을 가다가 하나님의 손에 붙잡혀온 요나 선지자는 니느웨가 삼일 길을 돌아야 하는 큰 성읍임에도 불구하고 단 하룻길만 돌며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했습니다. 그리고는 성에서 나가 성이 잘 보이는 곳에 초막을 짓고 그 성읍이 어떻게 심판을 받아 망하는지를 구경하기 위해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요나 선지자의 기대와는 달리 니느웨 성읍 백성들은 자신들의 죄를 하나님께 회개하고 금식하며 용서를 구했고, 하나님께서는 진노와 심판을 거두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살면서 요나가 당한 일과 방불한 일들을 종종 만납니다.
“아니, 어떻게 저 가증스럽고, 교만한 자들이 오히려 잘 되는가?”
“아니, 어떻게 남을 속이고, 거짓을 일삼는 자들이 별 탈 없이 사는가?”
자신이 그들로부터 어떤 피해를 입었을 수도 있고, 간접적인 마음의 상처를 받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망해야 자신의 억울함이 좀 풀어질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의로움도 증명이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가 기억해야하는 사실이 있습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을 심판 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이 없습니다.
아니, 어느 누구도 '하나님의 의로우심 앞에 항의 할 수 있을 만큼' 의로운 사람은 없습니다.
“정체성 없는(?) 콜라(Colar)"
저는 콜라를 무척 좋아합니다. 사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콜라를 즐겨 마셨지만, 요즘은 사정이 좀 달라졌습니다.
가끔씩 친교시간에 남자 테이블에서 “역시 피자에는 콜라지요!”하는 이야기를 자주 주고 받습니다. 아무리 건강을 생각하시는 분들도 햄버거나 피자를 드실 때는 시원한 콜라가 생각나시는 모양입니다.
‘눈 먼 기독교’라는 강렬한 제목의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저자가 아프리카 수단에서 겪었던 신비한(?)경험을 이야기하는 대목이 있습니다.
마실 콜라를 사기 위해 어느 가게에 들어가서 냉장고문을 열었는데 ‘콜라병에 7up 뚜껑이 씌워져있는’ 묘한 콜라를 만납니다. 그리고 더 황당한 것은 그 콜라병 안의 내용물은 선명한 오렌지색의 Fanta 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의아한 마음에 “왜 콜라가 아닌 콜라를 콜라라고 파느냐?”라고 가게 점원에게 묻자 이렇게 대답합니다.
“우리나라는 너무 가난해서 모든 걸 재활용합니다. 그리고 내용물과는 상관없이 콜라병에 들어 있으면 우리나라에선 콜라라고 부릅니다.”
언제 부턴가 우리들 주위에는 그 정체성이 모호한 것들이 제법 많아졌습니다. 시대적인 구분으로 현대후기/포스트모던이라 불리는 이 사회는 ‘다양성’이라는 특징 때문에 ‘다원주의사회’라는 별명도 가지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절대(絶對)’라는 것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두가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각자의 기준과 가치의 좌표를 가집니다. 그리고 상대가 가진 기준과 가치에 대해서 존중하는 교양을 보여야 하는 것을 사회를 유지하는 중요한 체계로 소유하고 있습니다.
남자와 여자의 구별도, 아이와 어른도, 선생과 학생도, 부모와 자식도, 심지어는 선한 것과 악한 것도 그 구별과 정체성이 불분명한 세상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것은 “신자인듯 신자아닌” 신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분명한 고백과 천국에 대한 확실한 소망은 가지고 있으나, 성품과 삶에서는 믿지 않는 이웃들과 하등의차이가 없는 ‘정체성 없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매 주일 예배를 드리고, 크고 작은 모임을 위해 교회로 모이지만 그리스도를 닮아가는 것과 그의 멍에를 지는 것으로 말미암는 고난도 기쁨도 감사도 없는 신자들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을 향해서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는 자들”이라는 지적을 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 믿는 우리가 ‘신자’라는 이름을 가진 것은 우리의 삶이 “살든지 죽든지 그리스도가 존귀케 되기 위함입니다.”
당신은 진짜 콜라(Colar)입니까? 아니면 7up뚜껑을 쓰고 콜라병의 옷을 입고 있는 환타(Fanta)입니까?
“끝까지 말렸어야지!!"
우리들 주위에서 흔히 듣는 이런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 분이 가족들과 친구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떤 남자와 결혼을 했는데 막상 결혼하고 살아보니 자신의 결정에 많이 후회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친구들을 찾아가서 “왜 내가 결혼 한다고 했을 때 말리지 않았느냐?”고 아우성을 치면서 따져 물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가 말렸지, 말렸는데도 네가 결혼했잖아!” 하고 답했습니다. 그러자 그 여인이 이런 유명한 대답을 했습니다. “끝까지 말렸어야지!”
물론, 결혼은 더 깊은 수준의 이해가 필요한 오묘하고 신비한 것입니다만, 모두가 공감하는 어떤 부분이 있습니다.
판단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뒤늦게 후회할 일이 많습니다. “그때 좀 더 강하게 나갔어야 했나?” 아니 “그때 좀 더 양보했어야 했나?”하는 것은 사실 우리로서는 결정할 수 없고, 무엇이 옳은지 판단하기도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흔히 하는 “결과가 좋으면 모든 것이 좋다.”라는 말처럼, 사람들은 결과론적으로 이해하고 설명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일의 결과가 좋으면, 본인이 의도하지 않았던 것이라 할지라도 모든 것이 훌륭해 보이고 좋아 보입니다. 심지어 그때 가지지 않았던 생각마저 다 옳았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그때 머뭇거린 것은 인내로 평가되고, 그때 망설인 것은 신중했다는 평가를 듣습니다. 심지어 신중하지 않았거나 깊은 고민을 하지 않았던 것마저 빠른 결단력으로 칭찬을 받게 됩니다. 그러나 일의 결과가 잘못되면 그때 머뭇거린 것은 바보 같은 짓이었고, 주저한 것은 배짱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혹평을 받습니다.
우리 예수 믿는 자들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우리에게 믿음이 있다는 것은,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고 최선을 다한 후에 그 결과를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우리가 다 정하지 않고, 우리가 다 평가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이 모든 것을 “사랑을 가지고 행하라”고 말씀합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도 타인에게도 조급해 하지 않고 강요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은, 바로 우리의 잘못한 것을 가지고도 더 크고 좋은 결과를 만드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아무래도 좋다!"는 핑계로 밖에 쓰이지 못한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일하시는 그 깊이를 아직 다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고양이 목에 방울을?"
어린시절 알고 있던 이솝우화나 전래동화 이야기들이 사회풍자나 비판을 위해서 재미있게 각색되어 돌아다니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 가운데 저희들에게 친숙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느날 쥐들이 모여서 주인집 고양이에 대한 대책 회의를 가졌습니다.
"정말이지, 무서워서 못살겠어요. 부엌에 빵 부스러기라도 없을까 하고 얼씬 거리다가 고양이에게 잡혀간 쥐들이 한 두마리가 아니에요!"
동료 쥐들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건장한 황갈색 쥐 한 마리가 입을 열었습니다. "정말이지 큰 일입니다. 그래서 말인데요. 제 생각에는 우리 모두 한꺼번에 나가서 물어 뜯어 버리는 것이 어떨까 하는데요?"
그러자 무리에서 존경을 받는 흰수염 쥐가 말합니다. "그건 너무 위험한 생각이네. 고양이란 놈은 워낙 무서워서 우리가 떼를 지어 몰려가도 아무 소용이 없을거네!" 그리고 한참을 망설이더니 "자, 이러면 어떨까? 우리가 고양이와 싸우는 대신 차라리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아서 고양이가 움직일 때마다 방울 소리를 듣고 피하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다들 어떻게 생각하나?"
듣고 있던 모든 쥐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질렀습니다.
"그것 참 좋은 생각입니다." "네, 정말 좋은 생각입니다. 그런데... 누가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달죠?"
순식간에 사방이 (쥐 죽은 듯) 조용해졌습니다. 어느 쥐도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서지 않았습니다.
그리고는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하나 둘씩 자리를 피해 어둠 속으로 사라졌습니다.
실제로 교회 안에는 많은 문제들이 있습니다. 지도자의 문제, 교회 성도들간의 갈등, 신앙적인 미성숙의 문제, 구조적인 문제, 실천적인 문제... 그리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많은 불평과 비판이 쏟아집니다. 그러나 정작 이런 문제들에 대해서 헌신의 자리에 자원해서 나아가는 사람은 너무나 적습니다.
많은 이들이 진심어린 조언을 하기도 하고,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모두가 자신들의 주장이 얼마나 정당한가?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지, 결정적인 순간에 함께 헌신하는 자리까지는 나아가질 못합니다.
타인을 배려하지 못하는 일방적인 비판이나, 헌신이 함께 따라가지 못하는 불평은 '바닥에 굴러다니는 고양이 방울' 보다 나을 것이 없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거룩으로의 초대!!"
누군가에게 초대를 받아서 음악회나 좋은 식사 자리에 가는 것은 굉장히 유쾌한 일입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어느 대통령은 선거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많은 사람들을 백악관으로 초대해서 만찬을 베풀고, 기부금을 많이 낸 사람들은 백악관에서 잠을 자고 가게 했다는 신문 기사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아마도 그 사람들은 자기가 대통령의 초청을 받았다는 사실만으로도 자신이 대단히 중요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주위 다른 사람들에게 분명히 큰 자랑거리가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 신자가 된다는 것은 정말 특별한 일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세상의 어떤 선택 보다, 어떤 초대 보다 더 소중한 것입니다. 사도요한의 표현처럼,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살아 있는 교제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는 일에 초대를 받은 감격스러운 사건입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에 대하여 그다지 특별할 것이 없는 일로 치부합니다. 아무나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세상의 많은 종교 중에 하나를 선택한 것으로 여깁니다. 심지어 자신이 혹은 가족들 중에 누군가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사실을 숨기려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거룩한 삶으로 초대되는 그리스도인의 특권'이 무엇인지를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는 매 주일 예배의 자리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초대를 가볍게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배는, 우리의 컬컬하고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해서가 아니라, 영광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리가 믿음으로 응답하여 그 분께 찬양과 경배를 드리는 것이 우선입니다.
예배는, 세상의 어떤 귀한 모임이나 행사에 초대되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놀랍고 감격스러운 것입니다.
“여보세요, 거기 누구없소!!"
한 여행자가 그랜드 캐년에 가서 눈 앞에 펼쳐진 장관에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주 하나님 지으신 모든 세계'라는 찬양이 절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만 발을 헛디뎌서 절벽으로 미끄러지게 되었습니다.
간신히 한 나뭇가지를 붙들고 매달리게 되었습니다. 두려움에 사로잡힌 여행자는 있는 힘을 다해 소리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없어요? 나 좀 살려 주세요!”
그때 위에서 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내가 여기 있다. 너의 하나님이다.”
아무도 없는 곳에서 두려웠던 여행자는 너무 기뻤습니다. “당신이 거기 계셔서 너무 기쁩니다. 저를 구해 주세요!”
“그래, 내가 너를 구해주마! 그런데 그 전에 한 가지 물어 볼 것이 있다.”
“너는 나를 정말 믿느냐?”
여행자가 자신있게 대답합니다. “그럼요 주님, 저는 매 주일 예배도 드리고, 헌금도 아낌 없이 드렸습니다.”
“그래 좋다. 네가 정말 나를 믿는다면 붙잡고 있는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아라”
여행자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되묻습니다. “아니 주님, 이곳은 절벽입니다. 만일 그냥 손을 놓으면 저는 아마...”
“그래 나도 안다. 네가 정말 나를 믿는다면 그 나뭇가지에서 손을 놓아라!”
한참 동안 침묵이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이 여행자는 더 큰 목소리로 이렇게 외쳤습니다.
“거기 위에, 누구 다른 분 없습니까?”
물론 이것은 누군가가 만들어낸 재미있는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이 여행자의 가벼운 모습을 마냥 비웃을 수는 없을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세상과 인생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 의문을 가질 때가 있습니다.
“왜 이렇게 하실까? 아니 왜 이렇게 하지 않으실까?”
심지어 우리는 우리의 구원을 완성해 가시는 하나님의 구원사역과, 불완전한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를 통해서 잃어버린 영혼들을 부르시고 훈련해 가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회의를 가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보다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것 같아 보이는 다른 것에 눈을 돌리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허락된 모든 것을 감사함으로 받고 선하게 사용하되, 하나님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인격과 삶이 변하는 신앙"
요즘은 주위에서 박수를 받거나 칭찬을 받는 일들이 예전에는 아주 흔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무거운 짐을 들고 가는 노약자들을 돕거나, 길을 잃어버린 아이를 경찰에 연락해서 도움을 주는 일들입니다. 말하자면 ‘사람이면 마땅히 해야 할 일들’에 감동을 받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가 너무도 경쟁적이고, 성공 위주이며,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이기적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내가 욕심을 내는 것을 이루기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고 가르치는 시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아마도 이런 잘못된 시대정신과 개인의 비뚤어진 욕심이 합작으로 만들어낸 대표적인 병폐가 ‘인면수심(人面獸心)’일 것입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은 무슨 일에든지 열심입니다. 참 좋은 것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도 ‘열심’은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런데 교회들마다 지나친 열심들 때문에 정작 중요한 것을 간과하는 모습들을 종종 봅니다. 바로 인격과 삶이 말씀을 따라 변하며 성숙해가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들에게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고 말씀하십니다. 믿는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분리되어 허망한 것을 좇아가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서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고, 십자가에 기꺼이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순종하심과 낮아지심’은 모든 신앙인들이 닮아가야 할 모습입니다.
어린 시절, 친구의 부모님이 운영하시는 콩나물 공장에 놀러간 적이 있습니다. 큰 콩나물시루에 검은 천들을 덮어 놓고 정해진 시간에 부지런히 물을 주는 신기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런데 물이 다 빠져 나간 줄 알았던 콩나물시루에서는 콩나물들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적어도 일주일에 한 번, 일 년이면 52번, 10년이면 520번 예배를 드리고 말씀을 듣습니다. 마땅히 변해야 하며, 성숙해가야 합니다. “나는 그렇게 오래 믿지 않았는데요?” 하고 핑계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콩나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홍수가 나서 물이 넘치면..."
지금은 은퇴하신 한 교수님을 통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고향집을 떠나 도시에서 공부를 마치고 한참만에 부모님을 뵙기 위해서 시골집을 방문한 적이 있으셨다고 합니다. 그런데 어느날 밤, 문 밖에서 들리는 수상한 소리에 잠을 깨서 밖을 내다보니 한 사내가 여기 저기를 뒤지고 있더랍니다. 바로 도둑이었습니다.
한창 젊을 때라 뛰쳐 나가서 날쌔게 그 사내를 잡아 넘어뜨리고 허리띠를 풀어 팔까지 꽁꽁 묶었답니다. 가족들과 이웃집까지 한 밤중에 일어난 소란에 모두 놀라서 나왔습니다. 얼마나 놀라셨는지 성깔이 불같은 아버님은 지게 작대기를 손에 들고 마당으로 나오셔서 휘두르셨답니다.
그런데 아버님의 손에 들려 있던 지게 작대기가 향한 곳은 도둑이 아니라 바로 아들의 등짝이었답니다. 이 교수님은, 아버님이 흥분해서 잘못 휘두르셨을거라 생각을 했습니다. 그러나 잠시후 아들의 등짝을 지게 작대기로 내려 치셨던 아버님은 땅바닥에 넘어져 있는 도둑을 일으켜 세우고 그 등에 쌀 한 말을 올려 주셨답니다.
다음날 아침 이 교수님은 도둑을 잡은 칭찬은 고사하고, 한바탕 혼쭐이 나셨습니다. “너는 평생 법에 안 걸릴 일만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지? 어제 밤에 그 놈도 내가 말은 안했지만 다 알만한 이웃에 사는 사람이다. 이 추운 겨울에 여북하면 남의 집에 뭘 훔치러 왔겠느냐?”
안타갑게도 오늘날 우리들 주위에서는 이런 여유와 관용을 기대하기가 힘듭니다. 물론 법도, 질서도 다 필요 없다거나 배가 고프면 남의 것을 훔쳐도 된다는 이야기를 드리려는 것이 아닙니다. (꼭 핑계로 삼는 분이 있습니다.)
오래전에 읽었던 라인홀드 니버(Reinhold Niebuhr)의 ‘율법과 사랑’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법과 원칙만을 가지고 잘 살 수 있다면 오늘날처럼 법이 넘쳐나는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홍수가 나서 사방에 물이 넘치면 오히려 마실 물이 부족하다.”는 이야기가 있듯이, 우리는 언제나 우리를 보호할 때면 “법 대로 하자!”고 하지만, 정작 우리가 불리할 때는 ‘사랑’을 외치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의 공의와 법으로만 처리하지 않으시고, 사랑과 은혜로 대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요. “너희 관용을 모든 사람에게 알게 하라 주께서 가까우시니라” (빌4:5)
“아이는(?) 버리지 마세요!!"
오래전 한국에서 목회자들을 위한 산상집회가 있었는데, 연세가 지긋하신 교계의 원로 목사님께서 후배 목사들에게 이렇게 권면하는 말씀을 하신 기억이 있습니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열심과 감동은 있는데 반해서 중요한 내용(알맹이)은 잃어버린 것 같습니다. 모이는 일에 있어서는 실패하지 않았지만, 그 모이는 일로 인하여 칭찬 받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과거 사도 바울이 초대교회들, 특히 고린도교회를 향해서 꾸짖었던 것도 바로 이것입니다. 성경에 대한 풍성한 지식과 넘치는 은사들이 있었고, 모이는 일에 있어서도 실패하지는 않았지만 ‘교회의 정체성이 무엇인지? 성도로 사는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개신교 교회들이 행하는 성찬식만해도 그렇습니다. 과거 로마 카톨릭 교회가 지나치게 형식을 강조하고 세세한 동작들과 각종 집기들에까지 과한 의미를 부여하는 것에 대한 반발로, 성찬식의 횟수도 줄이고 그 형식도 간소화해서 설교와 찬양 중심의 예배가 자리를 잡도록 하는데는 성공을 했습니다만, 정작 성찬을 통해서 누려야 하는 소중한 유익과 은혜를 놓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마틴 루터가 자주 인용했다는 “Don't throw the baby out with the bathwater(목욕물과 함께 아이를 버리지 말라)”는 말처럼, 지나친 형식주의는 피했지만 오히려 성찬을 나눌 때마다 기억하고 지켜야 하는 중요한 의미를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다 주의 죽으심을 전하는 것이니라”는 말씀을 합니다. 우리는 성찬을 나눌 때마다 ‘우리의 죄를 위하여 죽으신 예수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또한 우리는 성찬을 나눌 때마다 ‘이 진리’를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믿지 않는 자들에게 전하겠다는 결심이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 일이 쉽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내가 깨닫고, 확신하는 것’ 딱 거기 까지만 하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진리가 아닌 것과 본질이 아닌 것을 비판하고 공격하기 위해서 우리의 모든 시간과 열정을 허비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소유하고 있는 진리를 지키며, 나누는 일에는 마음과 힘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나도 당신처럼!!"
열심히 자기 인생을 살고 있는 한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성공한 사업가이자 예수를 잘 믿기로 소문이 난 어느 부자의 운전기사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 부자 그리스도인은 가끔씩 이 청년에게 자신이 믿는 신앙과 성경 이야기를 들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어떤 날은 내세에 대한 소망과 천국에 대한 이야기도 들려 주었습니다.
어느날 이 부자 그리스도인은 자신의 자가용을 운전하는 청년에게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는 소망’을 이야기 하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여보게, 언젠가 우리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내 차를 자네가 가지게나”
이 청년은 너무 기뻐서 정중하게 감사의 뜻을 표했습니다.
또 부자 그리스도인은 청년에게 “주님이 다시 오시는 날, 자네의 모든 가족들을 내 넓은 집에 데리고 와서 살도록 하게 그리고 내 모든 땅과 재산도 자네가 가지도록 하게”라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날 밤 이 청년은 웬일인지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한 밤중에 청년은 잠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서 부자 그리스도인의 집으로 달려 갔습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놀란 부자 그리스도인은 한 밤중에 찾아 온 자신의 운전기사에게 물었습니다.
“아니 이 밤중에 무슨 일인가?”
이 청년이 대답합니다. “저는 당신의 자동차와 땅과 집과 재산을 원하지 않습니다.”
부자 그리스도인이 되묻습니다. “아니, 내 비싼 차와 집과 재산을 원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왜 그러지? 그럼 자네가 원하는 건 뭔가?”
청년이 간절한 목소리로 대답합니다. “저도 당신처럼,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고 싶습니다. 저도 당신처럼 천국의 소망을 갖고 싶습니다.”
초대교회의 성도들은 극심한 핍박 가운데서 신앙을 지켰습니다. 많은 이들은 신앙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그 핍박으로도 누를 수 없고, 죽음으로도 빼앗을 수 없는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한 소망의 기쁨’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무엇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무엇으로 하루를 견디십니까? 그리고 여러분을 향하여 “나도 당신처럼”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치사하다고?"
대학 병원에서 의사로 또 교수로 일평생을 살았던 어떤 분이 많은 제자들과 가족, 친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은퇴 축하 잔치’를 가졌습니다.
여러 동료들과 후배들의 칭찬과 그간의 업적과 공로를 치하하는 이야기들이 이어졌습니다. 그러다가 사회를 맡은 사람이 은퇴하시는 분의 아내에게 마이크를 넘겼습니다. 모인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 되었고 드디어 그 아내 분이 입을 열었습니다. “아니, 평생 해주는 밥 먹고 챙겨주는 옷 입고 살면서 그정도도 못했으면 그게 어디 사람이에요?”
아마도 함께 살면서 수고하는 아내에게 감사에 인색했던 남편에 대한 그간의 설움이 작정한 듯이 쏟아져 나왔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을 하면 상대가 자신의 짐을 덜어 줄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진다고 합니다. 감정적으로, 정서적으로, 경제적으로, 육체적으로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런 부분이 충분히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분들은 결혼이라는 것이 “족쇄같이 느껴질 때가 있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말하자면 자유로움에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날 잘못된 시대정신은 가정에 매여 있고, 가정 때문에 쩔쩔매는 사람들을 향해서 ’용감하지 못한 치사한 사람‘이라고 충동질합니다.
그러나 인생을 살아보면, 그것이 결국 우리 각자를 책임 있게 만든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마치 연줄에 연이 붙잡혀 있는 것이 아니라, 줄이 있기 때문에 연이 멋지게 날 수 있는 것과 같습니다. 답답한 마음에 연줄을 끊어 주면 더 잘 날 수 있을 것 같지만, 현실은 어김없이 어느 논두렁에 추락하고 말 것입니다. 그래서 가정은 사람들에게 책임과 인내를 가르치고, 연습하도록 하는 좋은 학교와 같습니다.
치사해지는 것이 아니라 책임을 져야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생각이 무책임한 이상이나, 허망한 논리로 도피하는 것을 막아주는 것입니다.
신자들 또한 동일한 현장에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교회’라는 또 하나의 가정과 연결이 되어서 매주일 함께 예배하고, 친교하고, 봉사하는 속에서 신앙의 책임을 훈련 받고 깊어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기독교 신앙과 천국에 대하여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가장 답답한 것이 “이렇게 분명하고, 이렇게 확실한데 왜 믿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답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비교가 정확치는 않지만 아주 오래전 이런 글을 읽었습니다. 남북한이 서로 사절단을 파견해서 남한과 북한을 둘러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 남한에서는 “이북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보기만 하면 풍성함과 자유에 반해서 항복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들이 와서 보고 남긴 말은 “복잡하고, 공기가 나빠서 못살겠다.”였습니다.
이북 사람들 역시 이런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와서 보기만 하면 일사분란함, 맑은 공기에 반해서 항복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북한을 다녀온 사절단의 이야기는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였습니다. 명령과 감시 속의 모든 일상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우리 신자들 역시 “내가 믿고 확신하는 이 진리를 누구든지 듣기만 하면 깜짝 놀라며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실망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복음은 설명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라는 곡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를 보내신이도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믿고, 기뻐하며, 확신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예수 믿지 않는 자들을 향하여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저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복음을 믿지 않은 것에 대해서 정죄하고 비난하거나, 답답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풍성한 학문적인 배경도, 지식의 수준도, 살아온 환경도 이 복음을 깨닫는 일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택하신 것과 같이, 바로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는 차별도, 자랑도, 우월감도, 열등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부실공사(不實工事)"
한번은 한국에서 충북 청주에 있는 공군사관학교에 설교를 하러 가게 되었습니다. 간단한 신분조사(?)를 마치고 학교 안으로 들어서자 자로 잰 듯한 가로수 진입로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뿐만 아니라 쓰레기 하나 찾아 볼 수 없는 사관학교 내부는 그야말로 감탄이었습니다. 길을 안내하는 교육 장교가 이런 말도 해주었습니다. “이곳 사관학교 안에서는 큰 길 한 가운데 돈을 두어도 바람에 날려가지 않는 이상 그 자리에 그대로 있을 만큼 안전합니다.”
간단하게 식사를 마치고 집회가 시작되기 전 관계자 한 분과 함께 학교를 둘러보았습니다. 그러다가 아주 멋지게 지어진 실내 체육관 건물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함께 있던 분에게 건물이 참으로 멋있게 지어졌다고 칭찬을 했더니만,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바로 그 실내 체육관이 공군 사관학교에서 대표적인 부실 공사 건물이라는 것이었습니다. 겉모습은 번드르르 하지만 실내는 온통 물이 새고 건물 자체가 흔들리기 때문에 사용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그 건물은 철거하기로 결정이 되었고, 철거하는 비용만 해도 엄청나다는 것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우리의 삶을 집을 짓는 일에 비유를 한 곳이 있습니다. 금이나 은이나 보석으로 집을 짓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나무나 풀이나 짚으로 짓는 사람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 비유는 얼마나 비싼 재료들로 집을 짓느냐에 대한 것이 아니라 “불에 타는 것으로 지었느냐? 그렇지 않으냐?”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나중에 하나님께서 이 모든 것을 불로 심판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한 사람도 예외 없이 각자 인생의 집을 지어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뿐만 아니라 마지막 때에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의 기준으로 지은 집을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의 뜻과 여러분의 기준이 아닌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의 기준으로 판결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눈으로는 어떤 인생이 겉만 번드르한 부실공사인지 알 수 없습니다. 올바른 기초를 놓아야합니다. 성실하고 정직하게 쌓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기준이어야 합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칼빈의 ‘기독교 강요’를 보면 교회의 중요한 표지(慓識)로 내세우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올바른 말씀의 선포, 둘째는 올바른 성례(성찬과 침례)의 시행, 그리고 셋째는 올바른 권징(勸懲)의 시행입니다.
이 세 가지가 교회를 이루는 전부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적어도 이 세 가지는 분명한 교회의 기둥으로 자리를 잡고 있어야 합니다.
가끔 어떤 분들이 “한인 교회는 무엇보다 한인들이 모일 수 있는 만남의 장(場)이 되어야한다.”라는 이야기들을 합니다.
미국에 있는 한인교회 뿐만 아니라, 한국에 있는 많은 교회들이 ‘교회를 교회 같지 않게 짓는 것’이 유행이 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교회 안에 어린이 집은 물론이요, 대형 스포츠센터들과 다양한 행사들을 치를 수 있는 공연장들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물론, 명분은 “하나님을 모르는 일반인들이 교회로 들어오는 거부감을 줄이자”는 좋은 의미일 것입니다. 또한 함께 살아가는 세상에서 교회가 고립 되지 않고 '공존'하기 위한 의미도 있을 것입니다.
세상은 급격하게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전 세대와는 분명히 다른 관심과 다른 삶의 양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사실입니다. 변화하는 세상에 무관심하지 않고 적절하게 옷을 갈아 입거나, 오히려 먼저 변화를 주도하는 교회들을 향해서 손가락질 할 마음은 전혀 없습니다. 분명히 성장하고, 변해야 하는 부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변화들과 성장이라는 좋은 명분 속에서 정작 중요한 것들을 많이 잃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좋은 일을 하느라 중요한 일을 놓쳐버리는” 미련하고 어리석은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다른 어떤 것들 보다 먼저, 우리의 신앙생활과 교회 생활에서 올바른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배는 살아계신 하나님을 만나러 나오는 행위입니다. 예배는 즐거움이나 감동 이전에 우리를 예배로 부르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또 그렇게 살기 위하여 내 가치관과 내 삶을 고치겠다는 냉철한 마음으로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다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닌, 바로 하나님 앞에서 올바로 살아가야하는 여러분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우리를 구원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에 믿음으로 응답하여 그 분께 영광 돌리기 위하여 예배의 자리에 나오는 것입니다. 그 종은 바로 나를 위해 울리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1)"
수영을 하다보면 한 번 쯤은 이런 장난을 해 보았을 것입니다. 숨을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물속으로 잠영(潛泳)을 해서 가는 것이 멀리 가는지? 아니면 목표를 정하고 물속으로 잠영을 해서 가는 것이 멀리 가는지?
이론상으로는 숨이 ‘꼴깍’ 넘어가려고 할 때까지 참으면서 가는 것이 더 멀리 가야하는데, 실제로는 언제나 목표를 정하고 갈 때가 더 멀리 가는 것을 모두가 경험하게 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을 때까지 잠수해서 가다가 일어나보면 겨우 30m쯤 되는 지점입니다. 그러나 목표를 정했을 때는 숨이 넘어갈 것 같은 순간을 두어 번 더 참고 목표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에게 목표가 필요하다는 것은 누구나 인정하는 사실입니다. 목표가 없으면 비교되지 않고 목표가 없으면 분발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들의 신앙생활은 어떻습니까? 정해진 목표나, 견디고 가야할 도착지점이 있으십니까? 성경은 이 일에 대해서 이런 엄청난 목표를 우리에게 이야기 합니다. “오직 사랑 안에서 참 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 까지 자랄찌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
어떻습니까? 이것이 우리 모두가 요구받고 있는 목표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분량까지 우리가 자라도록 요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택하신 후에 따로 모아서 격리 시킨 후에 그들을 키우시는 것이 아니라, 여전히 살고 있는 동일한 환경에서 만들어 가십니다. 학교와 직장과 가정, 그리고 여러분들이 속한 사회 가운데서 자라게 하십니다. 모두다 죄의 유혹들과 만만치 않은 방해 요소들이 있는 곳입니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자라가야 하는 신자들이 모인 곳이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줄을 서서 지지합니까? 아닙니다.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없이 방해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뜻과 다르면 들이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음 주 계속)
“그리스도를 본받아(2)"
그렇다면, 교회는 어떻습니까? 교회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동일한 목표를 향하여 자라가야 하는 신자들이 모인 곳이지만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에서 어떤 일을 하려고 할 때, 줄을 서서 지지합니까? 놀랍게도 그렇지 않습니다. 무조건 반대하는 사람도 있고, 이유없이 방해하는 사람도 있고, 자기 뜻과 다르면 들이 받는 사람도 있습니다. 때로는 교회 일에 열심을 내는 사람들을 송충이 보듯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을 통하여 각자가 깨닫고, 고치고, 배우며 자라 나가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영적인 일은 더욱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 안에서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리스도의 분량까지 자라게 하시기 위해서 많은 일들을 통하여 우리를 훈련시키시는 것입니다. 때로는 인간의 생각으로 어떻게 손을 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무릎 꿇어 기도할 수밖에 없는 것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또한 한숨밖에 쉴 수 없는 최악의 상황도 만나게 하시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게 하십니다. 이런 모든 종류의 몸살을 앓으면서 교회와 교회에 속한 성도들은 함께 자라가는 것입니다.
오죽하면 사도 야고보는 이런 말씀으로 우리를 격려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약 1:2)”
교회란 참으로 놀라운 곳입니다. 우리의 눈에는 그렇게 보이지 않을지라도, 말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곳이며 더욱 영광스러운 것을 위하여 준비되고 훈련 받는 장소입니다. ‘준비되고, 훈련 받고, 자라나가는 곳’이라는 사실을 놓치게 되면 조급할 수밖에 없고 실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 보기에는 실패한 것처럼 보이고, 한없이 연약하고 보잘 것 없어 보이지만 모든 것이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준비시켜 가시고, 만들어 가시는 하나님의 지혜와 간섭하시는 과정인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믿는 것은, 하나님께서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시작하신 그의 구원 사역과 또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세우시고 성도들을 몸으로 삼으신 교회를 통하여 그의 자녀들을 완성하실 목표를 반드시 이루어 내실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저리 비켜!"
이런 우스갯소리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러 가지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모여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직업이 가장 역사와 전통이 긴가?”에 대해서 끝이 보이지 않는 논쟁을 하고 있었습니다.
판사가 나서서 말을 합니다. “판사가 가장 역사와 전통이 있는 직업이다. 그 이유는 아담이 타락했을 때 아담과 뱀 사이에 누가 잘못했는가를 하나님이 맨 처음 판결하셨기 때문이다.” 그러자 한 사람이 피식 웃으면서 이야기를 합니다. “아니다. 하나님께서 하와를 지어 주실 때 아담을 잠재우시고 그의 갈빗대를 취하시면서 외과 수술을 하셨다. 의사가 가장 먼저다.” 또 다른 한 사람이 나섰습니다. “천지를 만들기 전에 하늘과 땅이 공허하고 혼돈했었지? 누가 그렇게 혼돈 시킨 줄 알아? 바로 공산주의자가 그렇게 했다.” 그래서 ‘공산주의자가 이겼다.’는 확인이 안 된 이야기입니다.
우리 모든 인간들은 본성적으로 남에게 지지 않으려고 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물론, 이런 마음이 선한 일에 대해서 서로 경쟁하도록 하고 더 좋은 결과를 만들어 내는 유익한 경우도 있습니다만 ‘삐뚤어진 우월감’이나 ‘자존심의 싸움’으로 흐르는 경우도 종종 있습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들이 있고, 교회들마다 자녀들을 위한 좋은 프로그램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을 바르게 키워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현실들을 봅니다. 한국에 있을 때, 주일학교 어린 아이를 둔 어떤 집사님의 가정이 다른 교회로 옮기고 싶다면서 상담을 신청했습니다. 제일 큰 이유는 아이들을 위한 영어 프로그램이었습니다.
한국에는 이런 웃지 못할 이야기도 있습니다. 한 번은 어떤 목사님이 교회에서 운영하는 영어 유치원이 잘 되는지를 살펴보러 가셨답니다. 가시는 길에 한 유치원 아이와 복도에서 마주쳤습니다. 아이는 주저 없이 영어로 “Excuse me~"라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너무 기특하게 생각이 되어서 아이에게 “너 그게 무슨 뜻인지 아니?”라고 묻자, 아이는 이렇게 대답을 했답니다. "네 그럼요. ‘저리 비켜!’라는 뜻이예요."
물론, 현실이 풍자(諷刺)되어 있고 조금은 비약된 이야기라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은 아이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어른들의 세계에서는 더욱 심각해집니다. 서로가 대화를 나누는 자리에 앉아있으면 민망해서 낯이 뜨거워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겪은 일에 대해서 진심으로 기뻐해주거나, 슬퍼해주는 사람들을 찾아보기가 힘들어졌습니다. 대부분 빈정거리는 말들 뿐입니다.
누군가가 어떤 특별한 음식을 먹어보았다고 말하면, “정말 맛있었겠다.”라고 호응 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그거 나도 먹어 봤는데, 어떤 박사님이 그러는데 그거 너무 많이 먹으면 빨리 죽는데!”라고 합니다. 또 누군가가 돈 좀 벌었다고 말하면 “너무 잘 됐다. 축하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별로 없고, “돈, 나도 좀 벌어 봤는데 돈 많으면 교만해져!”라며 빈정대는 말들 뿐입니다.
그런데 더욱 심각한 것은 이런 문제가 교회 안에도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제가 교회는 거룩한 천사 같은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라는 비성경적이며 말도 안 되는 교회관(敎會觀)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 지적을 합니다. “벌써 선생이 되어야 할 너희가 아직도 어린아이와 같이 젖이나 먹고 단단한 식물을 못 먹을 자가 되었도다.”
“선생이 되라”는 것은 누구를 지적하고, 가르치는 자가 되라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습니다. 오히려 먼저 된 자로써 신앙이 어린 자들의 유치한 말들을 묵묵히 들어주는 수준을 요구하는 말씀일 것입니다.
교회는 허물 많고 상처 많은 죄인들이 모이는 곳입니다. 그래서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곳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리 비켜!”라는 말을 들을까봐 마음 졸이며 교회를 다녀야 한다면, 누구하나 마음을 열고 진심으로 대화할 사람이 없다면 그것만큼 성경과 거리가 먼 교회는 없을 것입니다.
“부끄럽지 않은 복음!"
우리는 ‘복음의 진리’가 (그야말로) 도처에서 주장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어쩌면 2000년 교회 역사 가운데서 가장 자유롭게 복음을 전하고, 가장 자유롭게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여전히 복음과 신앙에 대해 굳게 닫혀 있는 몇몇 국가들을 제외하면 어느 때보다 신앙생활에 대한 개인의 자유가 넘치도록(?) 보장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많은 신학자들과 교회 지도자들이 염려하는 것은 복음을 담는 포장지나 전달하는 기술은 화려해진 반면에 정작 복음의 내용이 크게 축소 되어 버린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 복음은 하나의 케케묵은 습관으로 전락되어서 무미건조하고, 하찮으며, 더 이상 질문의 대상 조차 되지 않는 텅빈 진리 취급을 받고 있습니다. 이제 더 이상 복음이 핍박의 대상은 아닌지 몰라도 더 이상 ‘진리와 신비(mystery)’의 대상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월터 브루거만(Walter Brueggemann) 이라는 신학자는 “그것은 복음 그 자체가 변질된 것이 아니라 복음을 소유하고 전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이 ‘시시한 것’으로 만들어 버렸기 때문이다.”라고 말합니다.
언제부터인가 교회는 다양한 사회봉사와 문화의 공간이 되었고, 그 안에서 울려퍼지는 설교는 더 이상 성경과 신앙 교리에 대한 진지한 가르침이 아니라 부부관계나 부모의 역할과 같은 단순화된 처세술을 그럴듯한 교회 언어로 전하는 곳이 되어 버린 것 같습니다.
복음의 진리가 ‘싱거운 것’이 된데에는 세상의 풍조나 사회의 정서도 분명히 한 몫을 했을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절대진리’라고 강요하지 말아야 하고, 상대가 가진 것을 하나의 신념(信念)으로 존중해야 하는 ‘다원주의 사회정신’말입니다. 우리 모두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백번 양보한다고 해도 가장 큰 책임과 잘못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습니다.
대강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성자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이 놀라운 복음은 그야말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을 우리가 믿게 된 것 또한 전율을 느끼기에 충분한 ‘하나님의 신비’입니다.
유별스러운 행사가 없어도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오신 사실만으로, 내가 가진 단순한 고백만으로도 넘치게 감사할 수 있는 대강절과 성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나는 하나님을 미워하고..."
‘하이델베르그(Heidelberg)’라는 지명을 이야기 하면 여러분은 가장 먼저 어떤 단어가 떠오르십니까?
어떤 분은 ‘황태자의 첫 사랑’이라는 소설이나 영화를 이야기 하시고, 또 어떤 분은 유명한 독일의 맥주가 떠오른다고 하실지도 모릅니다. 안타깝게도 아직까지 이 도시를 가보지 못한 저에게는 조금은 삭막(?)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개신교 신자들이 믿는 것을 잘 정리한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이 결정된 곳으로 알고 있습니다.
종교개혁이 진행되던 16세기 독일에서 ‘개혁주의 신앙’을 좀 더 분명하게 가르치고 전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고민하다가, 성경에 근거한 요약된 신앙문답(Catechism)을 만들었고, 그것을 최종 확정한 곳이 바로 1563년 하이델베르그에서 열린 종교회의였습니다.
우리가 알만한 다른 신조나 신앙고백서가 서술식으로 작성이 되어 있다면 ‘하이델베르그 교리문답’은 독특하게 묻고 답하는 형식으로 기독교 교리들을 가르치고 고백하게 합니다. 그 안에는 이런 눈에 띄는 대목이 있습니다.
문: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무엇을 요구합니까?
답:그것은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문:당신은 그 요구를 온전히 지킬수 있습니까?
답:아니요.(왜 그렇습니까?) 왜냐하면, 나는 본성적으로 하나님을 미워하고 이웃을 미워하기 때문입니다.
놀라울 만큼 솔직한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눈만 뜨면 하나님에 대하여 불순종하고, 불순종하고, 불순종하고, 이웃에 대하여 미워하고, 미워하고, 미워하고, 나만 알고, 나만 알고, 나만 아는 것이 우리의 부패한 본성이요 우리의 실제 모습입니다.
수년 혹은 수십년 동안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종종 신자들은 ‘사실(事實)과 당위(當爲)’를 혼동할 때가 있습니다. 성경이 그렇게 말씀하고 있고, 매 주일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십시요”라는 설교를 반복해서 듣다보면 마치 내가 그렇게 살고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거짓 안도감에 빠져 있기 쉽습니다.
사실 우리는 아무것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 모두의 매일 매일은 하나님의 변함없고 신실하신 인자하심으로 유지되며 인도되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고백과 간절한 기도는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기쁨과 감사는?"
예전 섬기던 교회의 한 집사님께서 이런 하소연을 하신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아무개는 좋은 남편도 주시고, 좋은 자녀들도 주시는데 저는 이게 뭡니까? 남편에게도 버림 받고, 아들은 젊은 나이에 어미 보다 먼저 세상을 떠나고, 환갑이 훌쩍 넘은 나이에 여자 혼자 이삿짐 트럭을 끌고 며칠을 운전해서 이사를 해야 하는 신세입니다. 남은 거라곤 언제 다 갚을지 모르는 빚더미와 손과 무릎에 관절염 뿐입니다.” 그리고는 이렇게 한 마디를 더 붙이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도 사람 차별하시나 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셨을 때에도, 모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그토록 놀라운 생애를 사셨음에도 불구하고 그 분은 헤롯의 칼을 피해 피난도 가셨고, 사람들에게 외면도 당하셨고, 오해도 받으셨고, 거하실 곳 조차 변변치 않으셨고, 제자들에게 배반도 당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혀 죽기 까지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눈으로는 실패한 것처럼 보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나신 날부터, 죽으시고 부활하신 모든 순간들이 한 순간도 하나님께서 외면하신 적이 없으셨습니다.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보내셔서 그렇게 일 하신 하나님께서 오늘 여러분의 생애 속에서도 여러분의 걸음을 그분의 뜻대로 인도하시고, 지켜주신다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해 마다 기억하고 지키는 성탄절의 가장 큰 의미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내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독생하신 그의 아들을 주신 이유는 바로 ‘흑암과 사망’에 놓여 있는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저와 여러분이 생명을 얻은 것입니다.
혹시라도 다른 사람들 보다 좀 더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수도 있습니다. 남들이 겪지 않는 고통과 번민 가운데 계실 수도 있습니다.
고난의 때에든지,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을 느끼실 때에든지 “예수님께서 무엇을 위하여 오셨는지?”를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을 믿는 저와 여러분이 기뻐하지 못하고 감사하지 못한다면, 이 성탄절에 진정한 기쁨과 감사는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과 우리교회는..."
‘교회’를 한 마디로 정의하거나 설명하기는 쉽지 않습니다. 신학적으로 교회를 설명하자면, “교회는 하나님이 부르신 백성들의 영혼을 채워 주시기 위해 하나님의 임재가 약속된 조직입니다.”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역사하심이 그분을 향하고 있는 각 성도들에게 쏟아져서 그들 영혼의 목마름을 풍성하게 해결해 주는 곳이 교회입니다. 말하자면 다른 어떤 것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모임이며 기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쉽게 표현하자면, 교회는 마치 가정과 같은 곳입니다.
가족이나, 결혼 생활을 “이래야 한다.”라고 규정지을 수 없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교과서적으로 규정할 수도 없습니다. 분명히 공통된 부분은 있지만 보편적이지 않고 모든 가족들 마다 특별하고, 특수하고, 유일한 존재들이 독특한 방법으로 화음을 만들면서 밀고 당기고 합의하고 복종하고 또 때로는 대립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이 가정입니다. 서로가 무한정 편을 들지도 않고 때로는 갈등을 통해서도 가정은 신비롭게 더 단단해지는 것입니다.
결혼해서 한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부부를 예로 들자면, “남의 부부 싸움에는 왠만하면 개입해서는 안 된다.”는 불문율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누가 잘하고 잘못하고의 문제라기 보다는 ‘복잡무쌍하게 얽혀 있는 상황’ 그 속에 있는 둘만이 해결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어느 교회가 잘하고 있고, 어느 교회가 잘못하고 있는가?”는 쉽게 말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닙니다. 세상이 교회를 비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는 이래야 한다 혹은 저래야 한다.”는 말들도 참 많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충분히 무엇을 해야하는지? 또 무엇을 잘못하고 있는지, 책임과 자기 잘못을 알고 있습니다. 부부 사정은 부부가 가장 잘 아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교회가 항상 옳을 수는 없다.’는 사실은 이천년 교회사가 증언하는 것입니다.
한 해를 마무리하고 새해를 맞이해야 하는 자리에 서 있습니다. ‘어떤 교회로 존재해야할지?’를 생각해 봅니다. 여러분 역시 ‘어떤 신자로 또 한 해를 살아야 할지?’를 고민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는 것으로 우리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하신다면 ‘상식선에도 못미치는’ 부끄러운 이야기일 것입니다. 주변의 시선과 평가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우리가 믿고 확신한 것을 우리의 삶에 담아내고 구체화하는 여러분과 우리 교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또 한 해가 지나고 누군가가 “왜 그랬어?”라고 물을 때 “하나님 앞에서 부끄럽지 않으려고 그랬어!”라고 답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집이 어디세요?"
‘소공녀(Little Princess)’라는 제목의 소설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았던 이 책은 부유한 가정에서 공주처럼 자라던 한 소녀가 아버지의 사업 실패와 죽음으로 자기가 다니던 기숙학교에서 하루아침에 다락방에서 지내야 하는 하녀 신세로 전락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소녀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기숙학교의 교장이 소녀에게 투자한 돈을 회수하기 위해서 하녀로 부리고 못되게 구는 안타까운 장면들이 나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소녀가 교장에게 불만을 이야기하자 교장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너에게 집을 제공해 주고 있잖아!” 그러자 소녀는 “이건 집이 아니에요”라고 대답합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집은 ‘가정’이라는 의미 보다는 비바람을 피하고, 잠을 잘 수 있는 공간으로서의 집이라는 개념이 더 큰 것 같습니다. 예전처럼 많은 식구들이 함께 살면서 물리적인 불편함과 경제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슬픔도 나눌 수 있고 기쁨도 나눌 수 있는 그런 집은 찾아보기가 힘이 듭니다.
여러분에게 교회는 어떤 곳입니까? 물론, 교회를 다니는 이유를 일일이 조사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어떤 분은 거기 가까운 사람, 친한 사람이 있어서 가기도 하고, 또 어떤 분은 안 가면 불편한 마음 때문에 좀 힘들어도 그냥 다녀오는 편이 낫기 때문에 가기도 합니다. 습관적으로 가는 분들도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가신다는 분들도 있습니다.
사실 교회는 생명을 맡은 곳입니다. 그래서 기능적이거나 경제적인 단체가 아니라 우리에게는 집과 같은 곳이어야 합니다. 가족들 모두가 불완전하고 미숙하지만 그것을 이해할 수 있고, 실수나 실패로 인해서 공포를 가지지 않아도 되는 안심할 수 있는 집과 같은 곳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막 살아도 되는 곳’으로 이해한다면 그것은 정말 못난 반응입니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 가늠할 수 없을 만큼 큰 ‘무한책임’을 맡은 곳입니다. 그러나 다른 한 편으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는 ‘무한기회’역시 허락받은 놀라운 곳입니다.
모든 가정이 같을 수 없듯이 모든 교회 역시 같을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 모두가 우리교회에 허락하신 독특함과 소중함과 특별한 가치에 대한 책임을 함께 가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세상은 평화 원하지만, 전쟁의 소문 더 늘어간다. 이 모든 인간고통 두려움뿐 그 지겨움 끝없네~” 중,고등학교 시절 교회에서 자주 불렀던 복음성가의 노래 가사 첫 부분입니다.
세상에는 두 가지 종류의 전쟁이 있습니다. 한 가지는 힘과 무기를 동원해서 나라를 빼앗기도 하고 지키기도 하는 전쟁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는 이 전쟁을 사람들은 가장 무서워합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 또 한 가지의 전쟁이 있습니다. 그것은 복음으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 아래에서 포로 되었던 자들을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만드는 영적인 전쟁입니다.
1차,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수많은 나라들이 잿더미가 되었습니다. 대한민국도 한국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이 죽고 삶의 터전은 폐허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위에서 놀라운 경제 발전을 이루어 냈습니다. 사실 이것도 큰 변화입니다. 그러나 복음으로 인해서 한 개인이 변하고, 가정과 사회가 변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것입니다.
복음은 죄로 인해 고통 받고, 죽음을 두려워하며, 삶의 이유와 자신의 존재 의미를 찾지 못하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에게 진정한 자유와 영원한 소망을 주었습니다. 또 이렇게 변화된 사람들이 가정과 사회에서 신분 차별을 무너뜨렸고, 절망하는 시대에 미래의 비전을 제시해 주었으며, 병원과 학교를 세우는 일들을 통해서 사회의 여러 영역에도 변화를 일으켰습니다.
그런데 오늘날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더 이상 사회에 변화를 일으키지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으로 안정되고, 먹고 살 만해진 사람들은 복음이 도대체 사람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들은 저마다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지역 사회의 시설과 단체들을 구석구석 찾아다니면서 다양한 시도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가 바뀌고, 사회가 바뀌었다고 해서 복음의 효과가 떨어지거나, 복음이 할 수 있는 일이 제한 된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여전히 죄의 영향력 아래 있고, 그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영원히 멸망할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이 땅에서 평안하기를 원하지만, 이 죄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다면 어느 누구도 평안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해입니다!"
“누군가로부터, 혹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를 받는 다는 것은 참으로 힘든 일입니다. 우리들 주위에는 뜻밖에 많은 사람들이 ‘오해’로 인해서 고통을 받고 있습니다. 가깝게는 가족들로부터, 친구, 직장동료, 심지어 요즘은 엄청나게 발달한 인터넷과 방송 매체들로 인해서 본의 아니게 세계인의(?) 오해를 받는 일도 있습니다.
오해란 참 무서운 것입니다. 오해를 받는 사람은 물론 오해를 하는 사람의 마음까지도 병들게 하는 치명적인 병입니다. 돈을 손해 보거나 사업에 실패한 것 보다, 사람으로부터 받는 오해 때문에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사람들이 더 많은 것이 우리들 현실입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을 하다보면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다른 사람들이 아니라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를 하는 성도들이 종종 있습니다.
물론, 무한하신 하나님과 그 분의 말씀을 유한한 존재인 우리가 다 알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때때로 사람들은 자신이 경험한 작은 부분과, 스스로가 정당하다고 우기는 욕심들 때문에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오해하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지식과 경험이라는 세계는 얼마나 작은 것인지 모릅니다.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다보면 인간의 지식과 기술에 감탄하는 때가 있습니다. “어떻게 이 큰 쇳덩어리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타고 하늘을 날 수 있을까? 도대체 누가? 어떻게? 이 기가 막힌 것을 만들어냈을까?”
그러나 그 생각은 잠시 뿐입니다. 이 거대한 비행기가 날고 있는 하늘을 만드신 분과, 그 하늘에 수 없이 많은 별들을 만드신 분을 생각하면 저절로 인간이 얼마나 작은 존재이며 동시에 경외감을 가질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경험과 지식으로 무한하신 하나님을 판단하거나 오해하는 것은 참으로 어리석은 일입니다.
우리에게 허락되어 있는 현실이 불공평하고 정당한 대접을 받지 못하는 것 같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들이 다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할 뿐입니다. 우리가 다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하나님을 틀렸다고 할 수 없습니다.
"거울아, 거울아~"
거울이 없는 하루를 상상해 보셨습니까? 아마 상상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한국에서 한 때 유행했던 대중가요 가운데 가수 태진아씨가 부른 ‘거울도 안 보는 여자’라는 노래가 있었습니다.
그런가 하면 늘 거울만 끼고 사는 사람들을 놀리는 ‘거울 왕자’ ‘거울 공주‘라는 밉지 않은 별명도 있었습니다.
역사적인 기록들을 보면 거울은 이미 기원전 3000년경, 그러니까 지금으로부터 약 5000년 전부터 고대 이집트의 여인들이 거울을 보며 화장을 즐겼다는 증거 자료들이 있다고 합니다.
지나치게 외모와 얼굴에 집착하는 사람들 때문에 ‘외모지상주의’라는 말이 생겨나기도 했지만, 사실 거울을 보면서 자신을 살피고 가꾸는 것은 좋은 습관이요 건강한 삶을 위해서 필요한 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우리들에게는 외모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속사람을 볼 수 있는 거울이 하나 더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경’입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나 자신의 잘못 된 부분을 지적 받고 고칠 수 있고, 성경을 읽을 때 비로소 우리는 이 세상과 역사 속에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진정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오래전에 어느 성도님이 이런 의미심장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목사님, 여자는 나이가 들면 대중에 대한 예의로 화장을 해야 합니다.”
물론 이 말은 얼굴을 꾸미는 ‘화장’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입니다. 자신을 잘 살펴서 다른 사람들에게 흉하지 않도록 해야 하고, 스스로도 깨끗하고 단정한 모습을 유지하도록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의 속사람은 어떠십니까? 우리는 우리의 몸을 매일 씻고 외모를 살피는 것만큼, 우리의 영혼을 성경말씀 앞에 비추어 살피고 가꾸는 일에 게을러서는 안 될 것입니다.
“거울아, 거울아,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막다른 길에서 드리는 감사"
사람들이 가장 두렵고 답답해 할 때는 언제일까요? 아마도 길이 보이지 않을 때일 것입니다.
과거 한국에서 학생 시위가 한창일 때 학생들이 시내에서 데모를 하다가 경찰에게 쫓기게 되면 막다른 골목으로 들어가는 수가 있었습니다. 그럴 때는 옆집 담이라도 넘어야 하는데 담을 넘지 못하거나 넘다가 붙들리면 곤봉으로 무지하게 두들겨 맞고 결국 꼼짝 못하고 붙들려가게 됩니다. 이것이 만약 학생 시위가 아닌 전쟁 중에 막다른 길을 만난 다면 사살되거나 노예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도망을 치다가 막다른 길을 만나게 되면, 그때는 더 이상 소망이 없고 붙잡혀 죽는 것이 시간문제입니다.
성경을 보면 다윗은 수 없이 쫓겨 다니면서 더 이상 출구가 보이지 않는 막다른 길을 많이 경험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가 결코 절망하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인이었던 사울 왕에게 쫓겨 다니며 목숨의 위협까지 받는 상황에서도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와 찬송을 부르기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을 당하면 자포자기하게 됩니다. 그리고 자포자기할 때 나타나는 나쁜 현상은 바로 모든 원망과 불평의 화살이 남을 향하는 것입니다.
“내가 부모를 잘못 만나서, 내가 결혼을 잘못해서, 내가 친구를 잘못 만나서...” 그런데 이 원망과 불평은 결국 “하나님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으며 나는 하나님에게 속았다.”라는 뜻입니다.
다윗은 신실하신 하나님과 그분의 약속을 끝까지 믿고 의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 믿음으로, 전혀 나아지지 않아 보이는 막다른 현실 가운데서도 그는 오히려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평안할 때, 부족한 것이 없을 때에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습니다. 어려움을 당했을 때, 위기를 당했을 때 우리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우리의 진정한 신앙 수준입니다.
막다른 길을 만나셨습니까? 신실하신 하나님을 믿고 오히려 감사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기대하지도 못했던 놀라운 일들을 경험하게 되실 것입니다.
"잠깐, 흥정을 멈추시오~"
바다 한가운데 위태롭게 떠 있는 구명보트에 두 사람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이 기도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오오, 하나님! 저희를 구해주신다면 내 재산의 삼분의 일을 당신께 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다시 기도했습니다. "오, 하나님! 만약 저를 구해 주신다면 내 재산의 삼분의 이를 드리겠습니다." 그래도 여전히 구원의 손길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동안 밤이 지나고 다시 아침이 왔습니다.
절망에 빠진 그는 무엇인가 결심한 듯 다시 간절하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무사히 구조된다면 나의 전 재산을..." 그 때 옆에 있던 다른 사람이 소리쳤습니다. "잠깐! 흥정을 멈추게! 저기 섬이 보인다네~"
하나님께 기도하며 응답받기를 소망하는 사람들, 특히 곤경에 처해서 급박한 하나님의 손길을 소망하는 사람들 가운데 이런 웃지 못 할 마음과 태도를 취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마치 선거에 나온 후보자들이 공약을 내세우는 것처럼 자신의 것을 내어 바치겠다는 약속을 합니다. 어떤 책에서 이런 모습을 ‘하나님과의 흥정’이라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하나님의 응답은 흥정의 대상이 아닙니다. 만일 흥정이라고 한다면, 무엇과 바꿀 수 있을까요? 우리가 가진 것 중에서 어떤 것을 내어 놓고 흥정을 한다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그 흥정에 응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의 만물이 다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허락 하시는 모든 것은 우리에게 값없이 거저 주시는 선물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며, 천국의 백성이 되는 것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우리를 천국 백성 삼으셨습니다. 어떤 조건도 요구하지도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에는 세상의 학벌도, 재산도, 건강도, 외모도 그 무엇도 흥정의 조건이 될 수 없습니다.
오늘도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시는 하나님 앞에 어떤 어리석은 흥정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간절히 우리의 소원과 필요를 아뢰며 하나님의 도우심과 은혜를 구해야 할 뿐입니다.
"그래도 감사,"
대부분의 사람들은 남이 만든 것을 사서 사용할 때는 그것이 그리 대단한 줄 모르다가 막상 자기 손으로 직접 만들었을 때에는 자신이 참으로 대단한 것을 만들었다는 자부심을 가지게 됩니다.
또 우리는 가게에서 파는 야채나 과일을 사서 먹을 때는 그것이 대단하다는 생각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본인이 직접 밭에 오이나, 호박을 심었는데 그것이 싹이 나서 꽃이 피고 열매를 맺으면 얼마나 신기해하는지 모릅니다. 처음에는 먹기조차 아깝고, 간혹 주위사람들과 나눠 먹기라도 할 때면 자신도 모르는 뿌듯함에 어깨에 힘이 들어가기도 합니다.
씨앗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참으로 신비롭기만 합니다. 그런데 이런 신기함은 자기 집에 아이가 태어났을 때의 신기함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물론, 아이들이 자라면서 이런 저런 이유로 부모의 속을 썩일 때 마다 한숨을 짓게 되지만 그래도 생명이 탄생하고 자라가는 것은 세상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신비함입니다.
이런 생명은 어디에서 왔을까요? 사람들은 보통 우리는 부모님의 뱃속에서 그냥 태어났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성경을 보면 다윗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머니 뱃속에서 직접 만드셨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내 장부를 지으시며 나의 모태에서 나를 조직하셨나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그저 옥수수 씨를 뿌리고 물을 주듯이 키우지 않으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계획하시고 어머니의 뱃속에서 직접 만드셨다고 성경은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땅에서 살아가는 형편과 처지는 여러 모양일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넘칠 수도 있고 부족한 부분이 있을 수도 있습니다. 혹은 짧은 인생일 수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스스로를 귀하게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천지의 주재(主宰)이신 하나님께서 직접 우리의 심장과 폐부와 장기들을 만드셨고 생명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사실 앞에 우리는 늘 감사해야 할 것입니다.
"장수만세!!"
“♬♪ 할아버지 할머니 노래를 하고 아들, 손자, 며느리도 함께 불러요”
오래전 한국 T.B.C 방송에서 방영되었던 ‘장수만세’라는 프로그램이 시작되면 흘러나오던 노래입니다. 오늘날처럼 핵가족 문화가 자리를 잡기 전, 그야말로 온 가족이 함께 방송에 나와서 노래자랑을 하던 인기 프로그램이었습니다.
어느덧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백세시대’를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느 때 보다 각자의 노후를 준비하기 위해 분주하게 노력하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어느 신문 기사에 “준비되지 못한 장수는 재앙이다.”라는 글이 실릴 만큼, 사람들의 수명이 늘어난 것은 현실인 것 같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오래 사는 문제’에 대해서 고민 하지 않았을 것 같은 15세기 초에 쓰여진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The Imitation of Christ)라는 고전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오래 살기를 바라면서 바르게 사는데 무관심한 것은 어리석은 것이다. 현재의 삶만 생각하고 앞으로 닥칠 일에 무관심한 것도 물론 어리석은 것이다. 영원한 즐거움을 사모하지 않고 순식간에 지나가는 것들에 온 마음을 빼앗기는 것은 더욱 어리석은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인생이 가지는 의미는 다분히 이중적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처럼 각자의 인생을 세상의 역사 위에서 살아가는 것이 그 한 가지입니다. 성실하게 살아야 하고, 책임감 있게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요한 인생이 가지는 의미는 바로 ‘우리 모든 인생들은 하나님 앞에서 살아가며, 하나님의 평가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는 없습니다.
모든 사람들에게 ‘오늘’이라는 똑같은 분량의 하루가 주어지고, 그 하루 속에 자신이 믿고, 소원하는 것을 담아내는 것입니다.
은퇴를 앞둔 어느 목사님께 한 후배 목사가 질문을 했습니다. “은퇴 후에 어떤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까? 남은 인생을 어떻게 살고 싶으십니까?”
“나는 그저, 한 사람의 그리스도인으로 훌륭하게 늙어가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노후대책은 어떠십니까?
"외삼촌?"
오래전에 교회에 출석했던 여학생이 결혼을 해서 저희 부부를 초대했습니다. 선한 인상을 가진 성품 좋은 남편과 세 살, 두 살 짜리 딸 아이들과 함께 사는 모습이 너무 보기 좋았습니다. 고등학생 시절 유학을 와서 저희를 통해 교회에 출석을 하게 되었고, 신앙을 키워갔습니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서 벌써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습니다.
기쁘고 반가운 마음으로 준비한 식탁에 함께 앉았지만, 현실은 밥 보다는 더 좋은 것이 많은 아이들에게 지치지 않고 한 숫가락이라도 더 먹이려는 열정적인 초보 엄마 아빠를 지켜보는 기분 좋은(?) 시간이었습니다.
모든 아이들은 기어 다니고, 말을 하기 시작하면서 부터 사랑스러운 말썽쟁이가 됩니다. 그리고 부모들은 야단과 잔소리꾼이 됩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어릴때는 제일 좋아하는 사람이 누군가 하면 ‘이모나 외삼촌’입니다. 왜냐하면 이모나 외삼촌은 가끔 나타나서 목말도 태워주고, 동물원도 데려가고, 용돈도 주기 때문입니다. 심각하게 잔소리를 하지 않습니다. 사탕이나 과자도 눈치껏 먹게 해 줍니다. 왜냐하면, 양육할 책임이나 권리가 엄마 아빠 만큼은 없기 때문입니다.
아이를 낳아 놓고 끝인 부모는 없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만 특별한 경우입니다. 누구나 백일 잔치만 끝나고 나면 그때부터는 늘 야단치고 잔소리하면서 싸우는 것이 일상입니다. 아이들과 싸우고, 아이들 문제 때문에 부부가 싸웁니다.
그래서 아이들은 누구나 자라면서 한 번쯤 하는 소리가 “삼촌이 우리 아빠였으면 좋겠다. 이모가 우리 엄마였으면 얼마나 좋을까?”입니다.
부모들이 자녀 교육에 실패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아이들에게 지기 때문입니다. 바른 것을 가르치고, 바른 길로 인도하기 위해서 싸우는(?) 것을 포기하기 때문입니다. “제발 커서 꼭 너 닮은 애 낳아서 키우기를 간절히 바란다!” 라는 말로 책임을 회피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우상이 우리 하나님이었으면 좋겠다!”라고 생각한 적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말 못하는 우상들과는 달리, 자기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거룩을 위해 간섭하시고, 징계하시고, 잔소리(?)를 하시기 때문입니다.
부모가 되어서 자녀를 키우셨고, 또 그 자녀들이 아이를 낳아 양육하는 모습을 지켜보시는 여러분의 마음은 어떠십니까?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 조금은 이해가 되십니까?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어느 주일 예배 후에 교회 성도들이 함께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게 되었습니다. 남자 집사님 한 분이 어디서 찾았는지 설탕을 통째로 가지고 오셔서 여러 숟가락을 넣고 휘휘 저어서 달달한 설탕 커피를 만들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몇몇 분이 따라서 설탕 커피를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어디선가 짜증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커피야. 나는 설탕을 넣으면 커피 맛을 전혀 모르겠더라. 요즘은 한국에서도 그렇게 안 마신데요!”
일순간 분위기가 살얼음판이 되었고 “한국에서도 안 마시는(?)” 설탕 커피를 만든 집사님은 졸지에 중죄인이 되었습니다.
가끔씩 무서울 만큼 똑같은 어조로 “아니, 무슨 신앙이 그래?”라고 이야기 하는 분들을 만날 때가 있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한 사람이 나옵니다. 두 사람이 함께 성전에 올라갔습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두 팔을 벌리고 큰 목소리로 기도합니다. “하나님, 저는 일주일에 두 번씩 금식하고, 십일조를 드립니다. 저는 남의 것을 빼앗지도 않고, 간음을 행하는 자들과도 같지 않고, 무엇보다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이어서 세리는 감히 얼굴을 들지도 못하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성경에는 없습니다만, 고개를 돌려 세리를 내려다보며 이렇게 한 마디 했을 것입니다. “아니, 무슨 신앙이 그래?”
신앙인들 중에는 본인이 진지한 신앙을 갖고 싶다면서 그 표를 내는 데만 치중을 하는 분들이 종종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자녀 된 신앙을 표현하는 것은 몇 가지 종교적인 행위들로 자기를 치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남을 긍휼히 여기며, 상대방의 아픈 상처를 이해하고, 어루만지는 것으로 나타나야 할 것입니다.
물론 우리의 신앙이 비장하고, 장렬한 싸움이 되어야 할 때도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에 대해서 목숨이 요구되는 순교 앞에서는 굽힐 것도 없고, 타협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신앙이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시기에도 밤낮 힘을 주고 부들부들 떨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칼 바람이 부는 엄동설한에는 그 생명을 지켜내기 위해 힘을 다하고 장렬해야 되지만, 꽃이 피는 봄이 오고 열매를 맺는 여름을 지나서 가을이 되면 넉넉하고, 오래참고, 지혜롭고, 풍성해야 합니다. 온 천하 만물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어떻게 찾아 오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아니, 바로 당신을 어떻게 찾아 오셨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요.
자, 커피 한 잔 하시겠습니까?
"천하 만물 보다 더 ~"
물건과 물건 사이에는 믿음이라는 관계가 성립하지 않습니다. 인격과 물건 사이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인격과 인격 사이에서 성립하는 고급한 관계입니다. 물론, 인격과 인격 사이에도 믿음 이외에 다른 관계가 성립되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이해관계’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익과 손해를 따라서 관계를 맺고 끊는 사람들도 있다는 것입니다.
예전과는 달리 요즘 동물을 키우시는 분들에게서 종종 듣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목사님, 동물은 배신을 안 하잖아요?”라는 말입니다. 말하자면 “믿었던 남편도 배신을 하고, 믿었던 아내도, 믿었던 친구도 배신을 하는데...”라는 속내가 감춰져 있는 것입니다.
등산을 좋아하시는 분들 사이에서도 비슷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산은 배신하지 않는다.” 언제 들어도 참 멋있는 말입니다. 그런데 곰곰이 생각을 해보면 등산을 갔다가 사고를 당하거나, 길을 잃어서 조난을 당했을 때 “산이 배신을 했다.”고 서운해 하고 마음 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자연과 같이 인격을 갖지 않은 쪽에 대해서 “왜 더 관심을 갖지 않았느냐? 왜 좀 더 힘쓰지 않았느냐?”고 실망하거나, 책임을 따져 묻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오죽하면 인격을 갖지 않은 대상에 대해서 그런 마음을 가지는가는 이해할 수 있습니다.
언제나 성도들의 가장 큰 약점 중에 하나는 ‘안 믿는 것도 아니고, 믿는 것도 아닌 것 같은 신앙생활’입니다. 왜냐하면 열심을 안 내도 큰 벌이 없고, 열심을 내도 뚜렷한 보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뭐하고 비슷한가 하면 ‘철없던 학생 시절에 학교에서 공부하는 것’과 같습니다. 성실하게 공부를 하는 학생이나, 공부 안 하고 농땡이 부리는 학생이나 당시에는 별 차이가 없어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나이를 먹고서야, 공부를 열심히 한다는 것이 단지 좋은 성적을 받고, 좋은 대학을 가는 것 이상의 의미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지금 여러분들의 신앙은 어떻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사소한 것 때문에 하나님 앞에 성실하지 못하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를 외면하고 있는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과 여러분의 자녀가 이해관계나 기계적인 관계로 묶여 있지 않은 것처럼, 하나님께서 우리를 믿음과 사랑의 특별한 관계로 부르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천하 만물과 '등을 지고서라도' 여러분을 택하실 것입니다.
"내가 사랑한 것 같이..."
자녀들이 어렸을 때 함께 놀도록 내버려 두면 열이면 열, 스물이면 스물 한바탕 싸움을 하기 마련입니다. 미국은 법적으로 그럴 수 없습니다만, 예전 한국의 경우에는 어린 아이들만 집에 두고 부모가 외출을 하면서 형에게는 동생을 잘 돌보라고 하고, 동생에게는 형 말을 잘 들으라고 당부를 한 뒤에 용돈을 적당히 건네주고 집을 나서는 때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부모가 집에 돌아오면 영락없이 동생은 울고, 형은 잔뜩 속이 상해서 뿔이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다투는 대부분의 이유는 이렇습니다. 부모님께 받은 용돈으로 장난감을 사서 한 번씩 교대로 놀기를 약속을 했는데 동생이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형이 그만 동생을 쥐어박게 된 것입니다.
부모님이 돌아오셔서 자초지정을 묻고 아이들에게 소신 발언의 기회를 주지만, 언제나 먼저 야단을 맞는 것은 형의 몫일 때가 많습니다. 이유는 뜻밖에 간단합니다. 형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 말속에 담긴 의미를 압니다. 어떤 문제를 놓고 ‘맞다 틀리다’의 차원에서만 싸울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인이 된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같은 문제를 놓고 ‘사실관계나 수학적인 오차’로 따질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있습니다. 오히려 ‘배려나 이해, 양보와 희생’ 같은 인격적인 깊이를 요구하는 문제들이 있습니다.
분명히 더 나은 소양과 실력을 갖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발휘하지 못했다는 것은 때때로 책망의 이유가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죄를 물으셔야 마땅하고, 그 죄에 대한 심판과 처벌을 내리셔야 마땅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지은 죄대로 처벌하지 않으시고 그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해결하시기로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 바울 사도는 이것을 ‘복음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라고 소개를 합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크기이며,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에게도 이렇게 당부하시는 것입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어디서 찾고 계십니까?"
어떤 사람이 밤중에 가로등이 드문드문 있는 길을 걷다 보니까 한 사람이 불빛 바깥 어두운 곳에서 무언가를 찾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무얼 찾느냐고 물으니까, 낮에 친구들과 놀다가 소중한 반지를 떨어뜨렸는데 어두워서 잘 보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지나가던 사람이 이렇게 말을 했습니다. “아니, 그렇게 어두운데서 찾으니까 당연히 안보이지요. 이쪽 밝은 가로등 불빛 아래 와서 찾으세요!” 라고 말입니다.
우리는 누구나 이 말이 이상하다는 것을 압니다. 아무리 어두워도 물건을 잃어버린 곳에서 찾는 것이 당연합니다. 밝은 곳에 가면 잘 보이기는 하지만 그곳에서 잃어버리지를 않았는데 어떻게 찾을 수 있겠습니까?
현대사회의 어떤 특징을 따라서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다원주의 시대’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다양한 가치와 기준이 공존하고 또 존중받아야 한다고 굳게 믿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는 인종, 문화, 종교 그리고 어떤 단어로 규정할 수 없는 많은 부분에 다양함이 있고, 서로에 대해서 예의를 갖추고 존중해야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런 셀 수 없이 많은 다양함에 대해서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이라는 타협할 수 없고, 양보될 수도 없는 하나의 절대 진리를 이야기합니다.
오늘날만큼 ‘포용(Tolerance)’이라는 말이 흔한 때가 있었을까 싶을 만큼, 너도나도 ‘다양성과 인권’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비포용성(Intolerance)을 공격합니다. “다양함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사실은, 모든 것을 인정하고 품을 수 있을 것 같은 ‘포용성’이 결코 용납하지 못하는 한 가지가 있는데 그것은 바로 ‘절대’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현대나 근대가 아니라 지금으로부터 이천년 전에 이미 성경에 기록된 사건이 있습니다. 사도행전 5장에 등장하는 바리새인 율법선생 가말리엘의 발언입니다. 복음을 전하다가 거듭 붙잡힌 베드로와 제자들을 놓아주자는 그의 설득은 표면적으로는 포용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의 관심은 제자들이 전한 복음이 ‘진리인가? 아닌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인본주의적 타협인 것입니다.
인생의 참된 기쁨과 진리를 찾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여러분의 선택은?"
사람들의 가치관과 사고방식이 많이 바뀌어서 어떨지 모르지만, 한 때 사람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질문이 하나 있습니다. “불이 난 집에 렘브란트의 그림과 고양이가 있다면 당신은 어떤 것을 들고 나올 것인가?”
‘남과 여’라는 제목의 프랑스 영화에서 남녀 주인공이 주고받은 이 질문 때문에, 족히 수천만 달러를 넘어가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애꿎은 고양이는 종종 불타는 심판대(?) 위에 오르곤 합니다.
영화 속 남자 주인공은 여자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서였는지, 너무도 덤덤하게 자신은 살아있는 고양이를 먼저 데리고 나갈 것이라고 대답합니다.
과연 실제상황에서도 그럴 여유가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누구든 절박한 위기의 상황을 만나게 되면 ‘자신이 진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무엇인지?’가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어떤 실천신학 교수님 한 분이 이런 흥미로운 상상을 해 보셨답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토요일 밤에 이 세상에서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사역을 중단시키시고 하늘나라로 불러들이신다면, 다음 날인 주일 오전에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에 있는 교회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이런 안타까운 추측이 가능하답니다. 많은 교회와 성도들의 예배가 별 차이 없이 드려질 것이라는 겁니다. 왜냐하면 성도들이 가지고 있는 기독교 신앙이 뜻밖에 성경적이지 않고, 하나님께 온전히 의존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당하는 위기 앞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거나,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기도보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는 내 뜻이 이뤄지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이상한(?) 기도를 자주 드립니다.
다른 사람들 말고, 자신을 살펴보기로 합시다. 나는 위기 앞에서 내 욕심을 따라 나를 기쁘게 할 것을 선택할 것인지? 아니면 내 안에 거룩한 것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을 선택할 것인지?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를 만날 때 비로소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인식합니다. 우리가 가장 외로울 때 주님을 찾습니다. 그러나 그때야말로 우리가 가장 힘이 있고, 가장 안전한 때입니다.
"결코 잊지 않으시는..."
사람들을 만나서 음식을 먹다보면 “좋은 걸 먹으니, 아이들이 생각난다.”라고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가끔씩 인면수심(人面獸心)이라는 말이 부족할 만큼 악한 사람들도 없지 않지만, 부모들의 자식 사랑은 거의 예외가 없습니다. 옛날 어른들의 말에도 “자식은 부모를 잊고 살 수 있어도, 부모는 눈 감는 순간까지 자식을 못 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성경에 이런 놀라운 말씀이 있습니다.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때때로 사람들은 삶이 여의치 않거나 조금만 어려워져도 하나님을 향해서 이런 원망을 쏟아 놓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저를 기억하고 계신 겁니까? 아니, 지켜보기는 하시는 겁니까?”
어느 신문에서 한국 사람들이 정치인들에 대해 가장 실망스러워 하는 말의 순위를 매긴 적이 있습니다. 그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잘 모르겠다.”라는 것과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단 정치인들만 그렇겠습니까?
왜 그들은 “기억나지 않는다.”라고 할까요? 많은 이유들이 있겠습니다만, 분명한 한 가지 이유는 그들이 “기억난다.”라고 말한 뒤에, 그 일에 대해서 책임질 수 있는 실력이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읽다보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백성들을 향하여 때로는 한 개인에게, 때로는 한 가정에, 때로는 한 민족을 대상으로 약속을 하십니다. 더 놀라운 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이 직접 만드신 피조물들과 맺으신 언약에 대해서 단 한 번도 “잘 모르겠는데, 요즘 통 기억이 나질 않아”라고 하신 적이 없습니다.
여러분 생각해보십시오. 젖먹이는 어미가 그 자식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상상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 그 어미가 자식을 잊을 수는 있어도, 우리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누가 감히 자신이 당하고 있는 현재의 고난 때문에 하나님을 향하여 “나를 잊으셨습니까?”라고 할 수 있습니까?
자녀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돈 때문에, 건강 때문에 불안하십니까? 당신은 하나님을 잠시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결코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
"무엇이 비극입니까?"
중, 고등학교 시절에 존경하고 좋아했던 목사님 한 분이 계셨습니다. 인물도 좋으셨고, 찬양도 참 잘하셨고, 무엇보다 겸손하고 따뜻한 인품을 통해서 전달되는 설교 말씀이 저의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교회의 많은 성도들 역시 목사님을 진심으로 존경했습니다. 아직도 제 기억 속에는 간절하게 찬양하시던 그 목소리가 또렷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온 교회 성도들이 특별기도회를 시작했습니다. 그 목사님께서 심장 판막에 문제가 생겨서 수술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달이 채 못 되어서 목사님께서는 45살의 젊은 나이에 많은 성도들의 안타까움 속에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으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마음아파 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목사님의 죽음을 비극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짧은 시간이었지만 함께 신앙생활 할 수 있었던 것이 축복이었고, 감사한 일이었다고 말합니다.
‘기독교 희락주의자’라는 독특한 수식어가 붙어 있는 존 파이퍼 목사님의 책을 보면 이런 글이 나옵니다. “진짜 비극은 가난이나 질병 때문에 고통 받는 것이 아니라, 넘치는 건강과 경제적인 부요함에 눈이 가리워서 영혼의 때를 알지 못하는 것입니다.”
육체의 건강이나, 물질의 부요함 자체가 악이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눈에 보이는 현실적인 만족함 때문에 영혼의 필요와 위기를 깨닫지 못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게는 가장 큰 비극이라는 말씀입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한 부자가 등장합니다. 어느 해 농사에서 “여러 해를 편안히 먹고 마실 수 있을 만큼” 큰 소출을 거뒀습니다. 아마도 탁월한 열심과 지혜로 얻은 결과일 것입니다. 또한 그는 넘치도록 풍성한 농작물을 위해서 ‘더 큰 곳간’을 지을 계획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뜻밖에 하나님은 그를 ‘어리석은 자여’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어느 민족보다 지혜에 대한 자부심이 강한 유대인에게 ‘어리석다’라는 것은 대단히 수치스러운 책망입니다. 왜 하나님은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셨을까요? 그것은 바로, 그의 영혼과 인생에 전혀 하나님이 고려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 부자는 자신의 영혼과 생명의 주인이 누구신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눈앞에 쌓여 있는 재산으로 자신의 삶과 영혼을 지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던 이 부자의 인생이 진짜 비극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난 토요일에 아침 기도모임을 마치고 저희 교회 김 장로님과 커피 한 잔을 마시며 교제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최근에 장로님께서 인터넷 방송국을 오픈하셨는데 한 주도 되지 않아 조회수가 7,8백명을 넘었다는 반가운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참고로 방송국 주소는 www.raincitytv.com 입니다.
모든 것이 빨라진 세상이 되었습니다.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난 일들이 실시간으로 전해지고, 아차! 하는 순간 전 세계인의 비난을 받기도 하고, 반대로 전 세계인의 관심과 박수를 받을 수도 있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과거 팔레스타인 땅에서 전도자들을 통해서 유럽으로 복음이 전파되고 그 복음이 유럽 전역에 퍼지는데 1700년의 세월이 걸렸다고 합니다. 그리고 유럽에서 대서양을 건너 북미 대륙으로 복음이 건너가서 전파 되는 데는 2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리고 북미대륙에서 태평양을 건너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까지 전해지는 데는 100년의 세월이 걸렸습니다. 그야말로 기하급수적으로 시간이 단축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마지막 남아 있는 지역에서 복음이 정체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소위 10/40 창(Window)이라고 불리는(북위 10~40도 사이의 지역) ‘아시아, 북아프리카, 중동지역’을 포함한 세계 인구의 3분의 2가 살고 있고 이슬람과 불교, 흰두교가 자리를 잡고 있는 나라들입니다.
몇 해 전에 메르스(Mers)라는 호흡기 질병이 한국에 들어가서 온 나라를 불안에 떨게 한 일이 있었습니다. 미국과는 달리 한국 정부관계자들과 담당자들의 초기대응이 적절하지 못해서 필요 이상으로 위기감이 고조되었고, 삽시간에 삼천리 방방곡곡으로 질환에 대한 소문이 퍼져갔습니다. 심지어 깊은 산골에 사는 분들에게도 예외는 아니었다고 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부정적인 질병에 대한 소문이나, 굳이 듣지 않아도 될 만한 이야기들은 너무도 빨리 퍼져 나가는데 “왜 복음은 이다지도 느리게 전해지는 것일까?”하는 생각을 해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아마도 사람들의 입과 귀가 좋지 않은 것을 듣고, 말하는데 더 익숙하게 길들여져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친히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 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그때가 언제인지 알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에게 허락된 시간과 공간 속에서 주님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이 복된 소식을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단디(?) 들어야 합니다!"
“단디 들어라! 이짝 따꿍을 끼라서 저짝에 끼아 마차라!” 중학교 생물 시간이면 어김없이 실험실에서 울려 퍼지던 선생님의 방언(?)이었습니다. 통역을 하면 이렇습니다. “잘 들어라, 이쪽 뚜껑을 열어서 저쪽에 끼워 맞춰라!”
당시에 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같은 반 친구는 “도대체 어느 나라 말이냐? 일본말이냐?”라고 물었던 기억이 있을 정도로 학생들 모두가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집중해서 들어야 하는 수업이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목사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출애굽의 뒷이야기’ 가운데 이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신 죽음의 사자가 애굽의 온 땅을 두루 다니면서, 처음 난 것은 사람과 짐승을 무론하고 죽이셨던 유월절 밤중에, 양의 피를 바른 이스라엘 백성들의 집을 제외한 모든 애굽 사람들의 동네에 ‘장자의 죽음’을 인한 통곡의 소리가 넘쳐났습니다. 그리고 그 밤이 채 지나기도 전에 바로는 모세를 불러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떠나도록 간청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바로의 재촉으로 발효되지도 않은 반죽을 그릇째로 옷에 싸서 애굽 땅을 서둘러 떠납니다. (여기까지는 성경에 기록 된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 중에 미처 애굽을 떠나지 못하고 남겨진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내일 출애굽을 한다.”는 광고를 흘려 들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뜻밖에 사람들은 눈으로는 상대방을 바라보고, 심지어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마음으로는 전혀 딴 생각을 하고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소한 일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이런 태도가 반복이 된다면, 결코 좋은 관계가 유지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도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면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는 더욱 그러해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소와 나귀도 그 주인의 음성을 알고 따르는데, 내 백성은 내 앞에 와서 고개를 숙이면서도 내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라고 탄식하십니다. 바로 “하나님 존중하는 마음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말라기 선지자는 책망합니다.
우리는 사람들과 이야기 할 때든지, 하나님의 말씀을 대할 때에든지 ‘존중하는 마음으로’ 귀를 기울이고 단디(?) 들어야 할 것입니다.
"차라리 저 거지처럼?"
사람들이 살다가 너무 고달프면 “차라리 정신병자가 더 행복하겠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있다고 합니다. 또 어떤 분들은 “차라리 한겨울 담 밑에서 볕을 쬐는 거지가 더 행복하겠다!”고 이야기를 하기도 합니다.
몇 년 전에 아주 반가운 친구에게서 연락이 와서 먼 길을 달려가 만난 적이 있습니다. 일찌감치 미국에 유학을 와서 공부도 하고 목회도 하고 있는 친구였습니다. 신학교 학부 시절에 워낙 학업 성적이 좋아서 학교 교수님들도 나중에 모교로 돌아와 교수가 되면 좋겠다고 추천을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런데 기대와는 달리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버린 모습이었습니다. 가정도, 목회도, 학위도 모든 것이 어그러져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긴 시간 지나온 이야기를 하는 중에 놀랍게도 실제로 이 친구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고백을 했습니다. 사는게 너무 고달파서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집을 떠나 이틀 동안 무작정 길을 걷다가 우연히 다리 밑에 있는 거지들을 보고 “아, 차라리 저 거지처럼 살았으면 좋겠다!”라고 탄식했다는 것입니다.
제가 감히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형편과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는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담 밑에서 볕을 쬐면서 행복해 하는 것은 ‘지고 있는 짐이 없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평화입니다.’ 그저 햇살 따듯하고, 한 끼 배부르면 그것이 전부인 인생을 사는 자의 만족함입니다.
가끔씩 삶이 너무 고통스러울 때 우리는 ‘책임이 없고, 생각이 없어서 가지는 평화’들을 부러워하며 잠시 넘겨다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생존을 위한 고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 식의 고민을 가지고 “저들이 행복하다!”라고 평가 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예수를 믿고 신자가 되어서 더 많은 고민이 있는 것은, 세상 사람들 보다 더 고귀한 책임과 안목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자랑할 만한 진정한 가치인 것입니다.
우리가 세상 풍조를 걱정하고, 우리가 살고 있는 미국과 조국을 염려하는 것도 그것이 다만 ‘민족주의적인 편들기나, 내 마음에 맞는 정당이 정권을 잡기 원해서’가 아니라, 보다 더 깊은 차원에서의 신앙적인 고민들이 우리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바로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환경 속에 살지만 하나님의 진리와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 더 깊은 고민과 무거운 책임을 가지고 사는 이유입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 고단한 현실이 우리에게 불행이 아니라 영광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믿습니다.
"사랑으로, 그리고 사랑으로!"
삶을 어느 소설의 제목을 빌어서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고도 표현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모드는 물질적으로는 어느 시대보다도 풍요로움을 만끽하고 있지만 누구나 ‘공허함과 허무함’을 호소하고 있는 시대에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한 사람의 고유한 인격으로 그 가치를 대접을 받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다른 사람이 기능적으로 내 자리를 대신 할 수 있는, 마치 하나의 부품이나 도구로 취급 받는데서 오는 슬픔이나 상실감일 것입니다.
언제 부터인가 사람들을 만나면 개인의 삶이나 인격이 결부되는 대화를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기껏 대화를 이어가는 주제들은 스포츠나 날씨 이야기 밖에 없습니다. 사람들과의 대화 속에서 인생의 희노애락은 일찌감치 사라져 버렸습니다. 오히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영화나 드라마 혹은 소위 ‘자기개발서’라고 불리는 책들로부터 인생을 배운다고 말합니다.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은, 위에서 언급한 일들이 우리 모든 신자들이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며 우리가 만나야하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자유와 풍요함’ 그리고 ‘상실감과 공허함’이 공존하는 이 혼돈스러운 세상 속에서 우리 신자들은 ‘세상이 우리에게 가져다 놓은 시험과 유혹거리들보다 어떻게 비교할 수 없이 크고 중요한 가치와 진리가 있는가?’하는 것을 증명해내야 하는 책임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말이나 글이 아니라, 우리의 실제 삶을 통한 변증이어야 할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기독교가 가장 큰 힘을 가졌던 중세시대에는 제도나 공권력으로 사람들을 잡아다가 교회에 넣으려고 했습니다. 우리는 그 실패와 부작용을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도 그와 비슷한 모습들을 주위에서 봅니다. 과거에는 힘을 가지고 강제로 했었다면, 오늘날은 ‘진심과 열심’이 사람을 잡습니다. 물론 ‘열심과 진심’을 버리자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이것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은 바로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고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성경이 ‘사랑’을 강조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셨고, 그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에게 세상과 하나님을 ‘화목’하게 하는 직책을 맡기셨기 때문입니다.
힘을 다해서 사랑하십시오. 이것이 우리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세상에 증명해내고, 그들을 구원의 자리로 이끄는 유일한 길입니다.
"부지런한 게으름, 고집!"
제가 잘 아는 신학교 교수님 한 분이 ‘시간을 선용하는 문제’에 대해서 학생들과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역사적으로 얼마나 많은 인물들이 자신의 시간을 철저하게 사용했는지를 실례로 들기도 하고, 이 땅에 육신을 입고 오셨던 예수님께서도 얼마나 자신의 생애를 다 소진하기까지 사셨는지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합니다. 모임이 마칠 무렵 대표기도를 하게 된 한 학생이 울먹이며 목이 멘 음성으로 이렇게 기도를 했다고 합니다.
“하나님, 너무 많이 자서... 죄송해요!”
많은 사람들이 묻습니다. “그렇다면 잠을 얼마나 자야 한다는 것입니까?”
얼마를 자야 건강한 수면 생활이고, 얼마를 자야 방탕하고 게으른 수면 생활인가?하는 것은 획일적으로 말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은 말합니다. 왜냐하면, 체질적으로 잠을 많이 자지 않으면 안 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보다 적게 자고도 활기차게 하루를 살 수 있는 사람도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히 남들보다 잠을 더 자야 하는 사람이 있고, 잠을 줄이고 좋은 음식과 운동으로 몸을 추스려야 할 사람도 있습니다.
이것은 비단 잠의 문제만이 아니라, 신자들의 신앙생활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얼마 만큼의 시간을 내서 성경을 읽고 전도하고 기도해야 부지런한 신자인지? 아니면 게으르고 방탕한 신자인지를 가늠할 수 있는 획일적인 기준은 없습니다. 모두가 다른 형편과 상황에서 일방적으로는 비교할 수 없는 삶을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다른 사람들은 몰라도 자기 자신을 살필 수 있는 좋은 눈금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집’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고집은 천성적으로 타고난 기질적인 고집스러움이 아니라, 죄인의 부패한 본성과 결탁한 ‘고집스러움’이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분명히 바꿀 수 있고, 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부지런히 게으름을 피운다면 그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죄는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을 향해 불경건하게 만들뿐만 아니라, 끊임 없이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고집으로도 나타납니다.
무지한 사람일수록 깨뜨려져 본 적이 없고, 깨뜨려진 적이 없는 사람일수록 고집이 셉니다. 우리의 고집을 깨뜨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우리는 비로소 진짜 하나님의 은혜를 맛볼 수 있게 되며 그 은혜 안에서 누리는 참된 자유함과 안식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돌을 던지지 않는가?"
여러분은 제목을 읽으시면서 어떤 모습을 떠올리십니까? ‘격렬한 시위 현장이나, 갖가지 원색적인 색깔의 구호가 내걸린 집회 현장’을 떠올리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중세 어느 한 성도가 회심한 이후에 자신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큰 죄인인지를 깨닫고, 길가에 다니는 사람들을 보면서 “왜 나 같이 도저히 용서 받을 길이 없는 추악한 죄인을 향해서 사람들이 돌을 던지지 않는가?”라는 마음이 들었다는 고백입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잠시라도 이런 마음을 가져 본 사람들이 얼마나 될까요? 오히려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음속으로 이렇게 생각합니다.
“왜 사람들이 나를 존경하지 않지?” “왜 내가 베푼 호의에 대해서 제대로 감사의 표시를 하지 않는 건가?” “왜 사람들은 나 같이 대단한 사람이 해 주는 충고를 귀담아 듣지 않는 건가?” (이 말들은 여러분이 실제로 주위 사람들을 통해서 듣고 계신 이야기들입니다.)
‘내가 누구인지?’에 대한 철저한 인식이 없이는, 우리는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은혜가 ‘얼마나 귀한 것인지?’ 그 가치를 결코 이해할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일만 달란트의 빚을 자신의 주인에게서 탕감 받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서 자신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모두가 팔려가야 하는 상황에서 주인의 은혜로 탕감을 받습니다. 얼마 후 이 사람이 길을 가다가 자신에게 일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무를 만납니다. 그 동무는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며 기다려 달라 간청합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자기에게 빚진 동무의 멱살을 붙들고 이렇게 말합니다. “아니다. 네가 빚을 다 갚을 때까지 옥에 가둘 것이다!”(참고로 한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한 사람의 하루 품삯이고, 한 달란트는 6천 데나리온에 상당하는 돈이었습니다.)
자신이 탕감 받은 수십억 달러에 비해서 지극히 적은 돈을 빚진 동무를 기다려 주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자기가 얼마나 엄청난 은혜를 입은 자인지’를 도무지 이해하고 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알고 계십니까?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죄 가운데 살다가 그냥 사라질 수 있는 나 같은 인생을 찾아오셔서 나를 구원해 주신 하나님의 크신 은혜와 측량할 수 없는 그 사랑을 잊어버리지 마십시요.
"무례한 기독교(?)"
한 때 인도를 점령했던 영국은 ‘성공회(Anglican Church)’라는 개신교 국가였습니다. 그러나 인도는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인도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던 네델란드 역시 당시에는 개신교를 국교로 선포했던 유일한 나라였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인도네시아 역시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점령국이었던 영국과 네델란드가 식민지배하에 있는 그들을 잔인하게 착취했기 때문입니다. 차마 사람이 사람에게 할 수 없는 방법까지 동원해서 노동력과 자원을 착취했습니다.
어떤 기록을 보면 인도를 지배한 영국은 사람들이 생명을 유지하는데 가장 필요한 소금을 독점해서 경제적인 이익 뿐 아니라, 사람들을 통제했다고 합니다. 또 아프리카에서 영국 사람들이 사업을 벌일 때에도 자신들이 전면에 나서지 않고 인도 사람들을 공사 감독으로 내세워서 아프리카 원주민들을 잔혹하게 일을 시켰습니다. 이런 사실을 알지 못한 아프리카 원주민들은 인도 감독들에게만 증오심을 품고 영국 주인에게 찾아가서 호소를 했다고 합니다. “저 인도 감독은 우리에게 너무 나쁘게 굽니다.” 그러면 영국 주인은 웃으면서 “내가 몰랐다. 잘 이야기 하도록 하겠다.”하고 돌려보냅니다. 그리고는 인도 감독을 불러서 다시는 그런 불평이 나오지 못하도록 더 혹독하게 부리라고 명령을 합니다. 그래서 지금까지도 아프리카 사람들은 인도 사람들에 대해서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합니다.
왜 사람들에게 이런 차별과 학대가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나와 너는 다르다!”라는 ‘삐뚤어진 우월감’ 때문입니다. 사람들이 저지르는 악한 행동들의 배후에는 말도 안 되는 우월감이 숨어 있습니다. 인종 때문에, 피부색깔 때문에, 더 많이 가진 것 때문에, 더 많이 배운 것 때문에 사람들은 상대방에 대해서 못할 짓을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예외는 아닙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을 알고, 진리와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자들이라는 사실이 그렇지 않은 자들에게 무례하게 굴거나 차별해도 된다는 자격을 부여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누구를 만나든지 ‘사람들 모두가 죄 아래 있고, 하나님의 은혜를 필요로 하는 대상’이라는 마음으로 예의를 갖추고 진심으로 상대방을 대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충돌을 피하기 위한 처세술이 아니라 ‘나를 포함한 모든 인간을 이해하는 신앙의 중요한 내용’이며,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가르치신 우리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인권 상황이 세상 사람들에게 공개된 것은 불과 20여년 전의 일입니다. 2010년에는 ‘TIME’ 이라는 한 주간지에 남편에 의해서 코가 잘려진 여성의 사진이 표지에 실려서 세계가 경악을 했었습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자들은 눈만 보이도록 온몸을 감싸는 부르카라는 겉옷을 반드시 입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얼마나 많은 구타와 속박을 당하는지 모릅니다. 어떤 여자는 남자가 불로 지지는 바람에 온몸에 화상을 입기도 했고, 심지어 맞아서 죽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합니다. 아프가니스탄의 여자들에게 인권이라는 것은 전혀 보장 받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실 남편에 의해서 ‘코가 잘려진 여성’의 경우는 우리나라 조선시대 말기에도 이미 있었던 일입니다. 1900년대 초, 여성 최초로 근대식 교육을 받고 간호사가 된 한 여인은 남편의 학대로 손가락 일부와 코가 잘려지는 끔찍한 일을 겪었지만 선교사들에 의해서 교육의 기회를 얻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간호사가 되었습니다. 한국 역시 복음이 들어가기 전에는 여자들의 인권은 거의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여자가 다른 사람들의 구설수에 오르내리면 가문의 명예를 위한다는 명분 때문에 목매어 죽어야만 하는 경우들도 많았습니다.
그런데 복음이 전파되는 곳에서는 그런 억압되고 속박된 사람들의 자유가 회복되기 시작합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존귀한 존재’라고 말씀하기 때문입니다. 단지 죄가 사람들을 그렇게 비참한 죄의 노예로 만들었을 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전해지면 가장 먼저 발견하게 되는 것이 바로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가?’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독생자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어 주셔서 죄에 빠진 나를 구원해 주실 정도로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 사랑을 경험한 자들이야 말로 내가 소중한 존재인 것처럼 내가 만나는 다른 사람들도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찾아야 할 참된 인권회복과 진정한 자유의 시작은 차별과 학대를 없애는 것으로 부터가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의 형상을 닮은 소중한 존재인 것을 아는 진리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십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응급실 가고 싶으세요?"
아이들을 키우다 보면 한 번씩은 응급실을 달려갈 만큼 위급한 상황을 겪을 때가 있습니다. 날카로운 물건에 손을 베이거나, 예상치 못한 것을 삼키는 바람에 다급한 마음으로 응급실을 찾게 됩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전해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배 목사님 한 분이 경기도 평택에서 목회를 하실 때 딸아이가 동전을 삼킨 적이 있었답니다. 당시에 예닐곱 살이었던 딸이 어느 날 부엌에서 자지러지게 울고 있어서 목사님이 놀라서 달려갔는데, 아이가 하는 말이 자기가 지금 십원짜리 동전을 삼켰는데 아마 죽을꺼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그 목사님은 어린 마음에 잔뜩 겁에 질려서 울고 있는 딸을 우선 안심시키기로 했습니다. 그래서 주머니에 있던 동전을 손에 쥐고 아이의 배를 문지르는 척 하다가 짠! 하고 동전이 나왔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아이에게 “자 이제 동전이 나왔으니까 그만 울어라”고 하셨답니다. 아빠의 깜짝 마술 덕분에 아이는 울음을 그치고 동전을 손에 쥐고 활짝 웃었습니다.
그런데 이야기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목사님이 한숨을 돌리는 사이에 갑자기 아이가 동전을 삼키더니 이렇게 말한 겁니다. “아빠, 다시 해봐요!” 그래서 아이를 데리고 응급실을 가셨다는 동화 같은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제 머리 속에 떠오른 생각은 “이런 분들이 우리들 주위에 많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 하면, 신앙생활을 하시면서 하나님 앞에서 이렇게 살아가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어떤 성도들은 ‘회개’를 죄를 용서 받는 ‘방법’정도로 가볍게 생각하시는 분들이 있습니다. 물론 우리가 진심으로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용서하신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는 죄를 지우는 지우개 정도로 우리에게 허락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아무리 작은 죄라도 스스로 감당할 수 없는 존재이며, 하나님만이 우리의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그 하나님의 거룩하심 앞에 다시 죄를 범하지 않겠습니다.”라는 믿음의 고백인 것입니다.
성경 로마서 6장에서 사도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
우리 모두가 죄를 짓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늘 죄 지을 가능성을 품고 또 유혹 가운데서 살아갑니다. 그러나 거듭난 우리는 죄가 얼마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운 것인지를 깨닫고 늘 주의하며 살아야 합니다.
죄에 대해서 결코 가볍게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동전을 자꾸 삼키시면 응급실 신세를 지셔야 합니다.
"땅 끝에서..."
우리나라 전라도 해남에는 ‘땅끝마을’이라 불리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을 ‘땅끝마을’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거기서 부터는 더 이상 갈 수 있는 육지가 없고 바로 바다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땅끝’이라고 생각하는 곳은 이렇게 지리적으로 땅의 끝인 경우도 있지만, 때로는 ‘이 세상에서 너무 구석지고 격리된 곳에 있어서 사람들이 아무도 찾아오지 않고 쓸쓸하게 버려진 곳을 가리키는 경우도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역사를 보면 ‘비운의 소년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단종’이라는 슬픈 왕이 있습니다. 어떤 왕들 보다 ‘완벽한 정통성과 자질’을 갖추었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그의 숙부인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강원도 영월의 깊은 산 속 마을로 귀양을 보내져서 그곳에서 숙부에게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귀양살이를 하던 단종이 한양에 있는 아내를 그리워하면서 올라가 바라보았다는 바위가 남아 있다고 합니다. 어쩌면 단종에게는 아무도 그를 찾지 않는 유배당한 그곳이 땅 끝이었을 것입니다.
그런가하면 한때는 ‘소록도’라는 곳이 수많은 나환자들에게 땅끝이었던 적이 있습니다. 누구든지 나병에 걸리면 그곳으로 가야했고, 일단 그곳에 가면 다시 가족이나 친척들에게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고 합니다.
저희들이 읽고 있는 시편을 보면 다윗 역시 ‘땅끝’으로 내몰린 적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에 의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가장 사랑했던 아들 중 하나인 압살롬에 의해서 반역을 당하고 요단 동쪽으로 도망을 쳤던 때가 그에게는 인생의 땅끝이라고 느낀 곳입니다.
사랑하는 아들과 믿었던 신하들에게 배신을 당해서 왕의 자리도 나라도 빼앗기고 한 밤 중에 맨발로 기드론 시내를 건너서 들판으로 도망을 쳐야만 했습니다. 시편 61편에서 다윗은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나님이여 나의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내 기도에 유의하소서 내 마음이 눌릴 때에 땅 끝에서 부터 주께 부르짖습니다.” 그곳이 바로 다윗에게는 땅끝이었습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경험이 있으십니까? 아니, 바로 지금 인생의 벼랑 끝에서 아무도 손을 내밀어 주지 않고, 한 걸음만 뒤로 밀려나면 천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것 같은 그런 지경에 처해 있는 분이 있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인생의 벼랑 끝이 다른 사람들에게는 삶의 끝이 될지 몰라도,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인생의 땅 끝이야말로 다윗처럼 살아계신 하나님을 철저하게 경험할 수 있는 ‘축복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싸울 준비가 되셨습니까?"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 시기에 공부하는 것을 힘들어하는 이유는 아마도 현실감(?)이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말하자면 “내가 지금 공부하고 있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디에 필요하며, 어떻게 쓰일 것인지? 그리고 어떻게 나에게 유익이 있을 것인지?”에 대한 분명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공부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을 것입니다.
어쩌면 예수 믿는 성도들의 신앙생활도 이와 같을 수 있습니다. 성도들에게도 예수 믿고 구원 얻어서 기쁨과 감사하는 마음이 넘쳐나는 시기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일들을 위해서 준비되고 채워져야 하는 때가 있습니다.
초대교회 당시의 제자들에게서도 이런 모습은 분명히 나타납니다. 그들은 예수님과 함께 많은 시간을 보냈던 자들입니다. 예수님의 행하시는 놀라운 일들을 직접 눈으로 목격하고, 가르침을 받았던 자들입니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은 언제나 안타깝고 부족해 보였습니다. 심지어 그들은 예수님께서 잡히시기 전날 밤 감람산에서 “깨어서 나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예수님의 부탁에도 불구하고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했던 자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제자들의 연약함을 책잡으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의 모습을 통해서 우리 자신과, 같은 신앙을 가진 형제자매들을 돌아보려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이런 것입니다. “나는 왜 이럴까?” 하는 것과 “저 사람은 왜 저럴까?”하는 마음입니다.
자신들의 선생님이 잡히시던 날 까지 잠 하나도 이기지 못했던 제자들은 복음서를 지나서 사도행전에 이르자 놀라운 모습으로 변해있습니다. 그들은 유대인들이 십자가에 죽인 예수가 바로 ‘구원자 메시아’라는 복음을 담대하게 전할뿐 아니라, 그 일 때문에 옥에 갇히거나 매를 맞는 모진 핍박들을 오히려 기뻐하는 자리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예수를 믿기 전에 하던 유일한 고민과 싸움은 ‘생존경쟁’입니다. 그야말로 먹고 사는 일을 위해서 수고하고 애를 쓰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이 불필요하거나, 악하다는 이야기는 결코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고 나면 (어떤 분들의 오해처럼) 이 생존경쟁이 면제 받는 것이 아니라 여기에 한 가지의 싸움이 더해집니다. 그것은 바로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영적인 싸움입니다.
사실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생기지 않았을 갈등과 고민입니다. ‘갈등’ 그 자체만을 생각하면 무거운 짐 하나를 더 얻은 것 같아서 여러분의 인생이 불행하게 느껴질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어려움이라고만 보지 말고 오히려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다는 중요한 변화로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이런 갈등과 싸움은 예수 믿는 성도들에게만 허락된 하나님의 축복이라는 차원의 인식이 필요합니다.
성경을 보면 예수를 믿는 모든 신자들은 ‘영적 군사’로 부르심을 받는다고 합니다. 이것은 누구를 죽이거나 망하게 하는 싸움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믿고, 소유한 복음이 진리라는 것을 우리의 삶 속에서 증명해내는 싸움’으로 부르심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많은 신자들의 신앙생활과 기도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으로 구하는 것은 ‘복’이 아닌가 싶습니다.
‘복 받기 위해서 기도하고, 복 받기 위해서 예배에 참석하고, 복 받기 위해서 헌금을 하고, 심지어 복 받기 위해서 회개하는 신앙생활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가장 흔하게 보여지는 모습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성공하고, 건강하게 살기 위해서 노력합니다. 계획하고, 노력하고, 고민하고, 주의를 기울입니다. 또 그것을 위한 동력을 얻기 위해서 꾸준히 운동하고 좋은 것을 가려서 먹는 수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그에 비해서 신앙생활에는 너무도 무관심하거나 피상적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실제적인 부름이며 실제적인 싸움입니다. 우리가 소유한 새로운 생명과 진리를 우리의 모든 말과 모습 속에 담아내야 하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오늘날 세상의 풍조는 이것을 위협합니다. “그냥 종교라는 울타리 안에 제한되어 있으라”고 합니다. 신앙생활은 조용히 교회에서만 하라고 합니다.
세상과 우리의 원수 마귀가 두려워하는 것은 “우리가 먹든지 마시든지 주를 위해 사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십니까? 싸울 준비가 되셨습니까?
"갈증 나십니까?"
이 세상에서 가장 참기 힘든 것 중에 하나를 꼽으라면 ‘목마름’이 있습니다. 굳이 당뇨와 같은 질병에 걸리지 않은 건강한 사람들도 갈증을 느낍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하루 동안만 물을 마시지 않아도 목마름 때문에 심한 고통을 호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육체의 ‘목마름(갈증)’만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인생을 살면서 ‘무엇을 하고 싶거나? 무엇이 되고 싶은? 혹은 무엇을 소유하고 싶은?’ 목마름을 가지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말 그대로 출세하고 싶어 합니다. 돈으로든 힘으로든 자신의 존재를 많은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갈증입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쾌락에 대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자신을 즐겁게 해 줄 무언가를 찾아서 끊임 없이 시간과 돈을 투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잠시 후면 사라질 목마름이요, 마셔도, 마셔도 갈증이 가시지 않아서 결국은 그 인생을 쓰러지게 만드는 바닷물을 마시는 것과 같은 목마름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목마름을 소개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배부를 것이요.” 바로 하나님에 대한 목마름입니다.
저희들이 함께 읽고 있는 구약성경 전도서를 보면 이 일에 가장 목말라한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 역시 그의 젊은 시절에는 세상의 부질없는 많은 쾌락과 성공에 목이 말랐던 사람이었습니다.
솔로몬 만큼 부귀와 지혜를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그의 부귀와 지혜를 직접 보기 위해서 에티오피아의 여왕이 솔로몬을 찾아왔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전도서에는 ‘허무와 허탄함’이 넘쳐납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것을 취해보고, 모든 것을 즐겨 보았지만 자신의 속에 있는 영혼의 갈증에 만족함을 얻지 못한 것입니다.
여기까지만 있었다면 솔로몬의 인생은 허무로 가득 찬 실패한 인생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의 인생 노년에 그는 가장 근본적인 것을 찾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집니다. “정말 영원한 것이 무엇이냐?” 한 세대는 가고 다음 한 세대가 오는데, 사람의 눈은 보아도 족함이 없고 귀는 아무리 들어도 채워지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해 아래는 그 무엇도 새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바로 “하나님은 영원하시다.”는 고백을 합니다.
그 하나님을 찾고, 그분의 말씀을 따라 사는 것만이 영원히 남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영원한 것에 대한 목마름이 있으십니까?
"너의 자랑이 무엇이냐?"
요즘 아이들에게서는 잘 찾아 볼 수 없습니다만, 예전에는 아이들끼리 놀다가 다툼이 생기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말이 있었습니다. 바로 ‘우리 아빠가 얼마나 무섭고 힘이 쎈가?’하는 것입니다.
나이가 들면서도 모양은 다르지만 이런 유치한 싸움은 그치지 않습니다. 아주 흔한 이야기 가운데 “동창회만 나갔다 오면 부부 싸움을 한다.”고 할 만큼 서로에게 기죽지(?) 않기 위해서 펼치는 ‘남편 자랑과 돈 자랑’은 총성 없는 전쟁터를 방불케 합니다.
사람들의 ‘자랑’이라는 것은 시대와 장소를 그리고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긍정적인 효과를 전혀 배제할 수는 없지만 대체로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때가 많습니다.
복음서를 보면,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 사이에서도 ‘누가 더 영향력이 있는 자인지? 누가 더 실력이 있는 자인지?’에 대한 다툼이 일어납니다. 아마도 선생 되신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장차 예수님께서 왕 위에 앉으실 때 더 나은 자리를 얻기 위한 싸움이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의 속마음을 이미 아신 예수님께서는 그가 다스리실 하나님의 나라에서는 “오히려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고, 한 알의 밀알이 되어 썩어지는 자가 가장 큰 자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주위에서 “내가 더 많이 배웠고, 내가 더 많은 것을 가졌고 그래서 내가 더 괜찮은 사람이다.”라고 이야기 하는 사람들을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좋습니다. 열심히 노력하고 부지런히 애를 써서 남들 보다 먼저 어떤 기회를 얻었고, 그래서 더 많은 것을 얻고, 더 나은 자리에 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 자랑은 얼마나 많은 것을 소유하고 있느냐?가 아니라 그 소유한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가?에 있어야 할 것입니다.
성부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으로 높이시며, 하늘과 땅과 땅 아래 있는 모든 자들을 그 이름 앞에 무릎 꿇게” 하신 것은 바로 그가 소유하신 모든 권세와 능력과 지혜를 자신을 증명하는데 쓰시지 않고 자기 백성을 죄와 사망에서 건져 생명으로 옮기는데 내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하나님께서 주신 아름다운 은사와 재능들이 있습니다. 모두가 다르게 받았습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을 마치고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날 분명히 우리에게 물으실 것입니다.
“너의 자랑이 무엇이냐?”
"김 박사 아십니까?"
한국에서 가깝게 알고 지냈던 선배 목사님 한 분이 몸이 아파서 동네에 있는 병원을 가셨습니다. 주치의가 “서울에 있는 큰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아 보시는 것이 좋겠다.”는 이야기를 해서, 대학 병원에 예약을 하니 6주 정도 뒤에나 차례가 돌아온다는 답변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교인 중에 그 병원 내과 과장과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분이 있어서 ‘새치기(?)’를 해서 일 주일 뒤에 특진을 받게 되었습니다.
담당 의사가 물었답니다. “환자분, 김 박사를 어떻게 아십니까?” “네, 제 고등학교 후배입니다.” “아, 그러시군요. 선배님!” 그 목사님께서는 서울에 있는 경기고등학교를 나오셨거든요. 그리고 일사천리로 검사와 치료가 진행 되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좋은 학교 나온 덕을 볼 수도 있습니다. 같은 고향, 같은 종씨 덕도 볼 수 있습니다. 잘 아는 친구를 통해서 어떤 편의를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답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 혜택(?)을 누린 목사님 역시 “아, 내가 좋은 고등학교 나오길 잘 했구나!” 라고 생각하신 것이 아니라 “우리가 참 말도 안 되는 사회에 살고 있구나!”라는 마음이 들었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이보다 더 좋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문화적, 기술적인 편리함과 다양한 혜택을 누리며 살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삶에 순순히 만족하며 사는 사람들은 많지 않은 것 같습니다.
돈과 권력을 가진 자들이 자신들이 소유한 것에 만족하지 못한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그것은 바로, 상대적으로 가지지 못한 자들과 비교해서 자신들의 가진 것에 대한 만족함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남들보다 더 가진 것이 인생의 해답이 되지 못한다는 분명한 사실을 다른 누구보다 자기 스스로가 잘 압니다.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과 돈과 힘으로 상대방을 유익하게 하고, 그것으로 얼마나 만족함을 얻고 있는지? 그것으로 기뻐하는 자들이 얼마나 있는지? 여러분과 여러분의 주변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물질적인 성공과 풍요함은 가졌는지 모르지만 인격과 영혼의 빈곤함은 우리들 스스로가 해결할 방법이 없습니다. 남편을 다섯이나 가지고도 자신의 인생에 대한 목마름을 해결할 길이 없었던 사마리아 여인이, 모든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났을 때 주체할 수 없는 기쁨과 감사가 넘쳤습니다. 여러분은 이 예수님을 아십니까?
"아무 말 대잔치(?)"
시대마다 지역 마다 조금씩 차이는 있지만 대체로 동양 문화권에서는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하는 표현 가운데 ‘오복(五福)’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말 그대로 다섯 가지 복을 가리키는데, 저희들이 잘 아는 것 가운데는 ‘장수의 복, 아프지 않고 건강한 것, 사는 동안 부족한 것 없이 넉넉하게 사는 것, 다른 사람들에게 덕을 세우며 사는 것’ 과 같은 사람들의 바램이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본래는 오복에 들어가지 않지만 모두가 예외 없이 ‘치아의 건강’을 오복 가운데 하나로 꼽기도 합니다.
그런데 최근에는 시대상(時代相)을 반영하기라도 하듯이 새로운 복이 하나 등장을 했다고 합니다. 60대 이상 된 한국 여자분들 사이에서 “이 나이에 남편 없는 건 5복중에 하나다.”라는 말들을 서슴없이 한다고 합니다.
“그냥 웃자고 한 이야기일 것이라!”고 생각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아주 작은 것으로부터 시작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꼭 이렇게 따지는 분들이 계십니다. “아니, 내 입으로 자유 민주주의 국가에서 마음대로 이야기도 못합니까?”
왜 내 입을 가지고 내 마음대로 못하겠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해야 할 말과 하지 말아야 할 말을 가릴 줄 아는 지혜와 성숙함이 있어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의 말에 대해서 침묵하지 않고 이렇게 말씀합니다.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사도 바울 역시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라”고 우리에게 권면합니다.
한 노모가 홀로 키우던 아들을 장가보내고 오랜만에 아들 내외를 보기 위해 시골에서 서울로 올라갔습니다. 양손에는 정성껏 담근 김치와 맛있는 젓갈이 가득 든 반찬통을 들고 힘겹게 아들집에 도착을 했습니다.
마침 현관문이 열려 있어서 거실로 들어서다가 우연히 아들 내외가 주고 받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답니다.
며느리가 묻습니다. “여보 당신은 이 세상에서 누가 제일 좋아?” 아들이 대답합니다. “당연히 당신이 1번이지!”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2번은?” “2번은 장모님!” 물론 그럴 수 있습니다.
“그럼 3번은?” “3번은 우리 강아지!” “그럼 4번은?” “4번은 우리 엄마!”
먼 길을 달려오신 어머니는 현관문에 김치와 반찬통을 놓고 이런 쪽지 한 장을 남겨 두셨습니다.
“4번이 3번에게 주고 간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 것 때문만이 아니라, 우리의 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계시기 때문에 우리는 더욱 우리의 말을 정결하게 해야 합니다.
"아니, 벌써?"
1970년대 많은 사람들이 따라 불렀던 산울림 밴드의 “아니, 벌써!”라는 노래도 있지만, 언제나 지나간 시간들을 생각하면 정말 “아니, 벌써?” 라고 깜짝 놀라게 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사실, 이 세상에 시간만큼이나 무정(無情)하고 무심(無心)한 것이 있을까 싶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무슨 사정이 있어도 시간은 늦게 가는 법이 없고, 멈추어 기다려 주는 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형편이나 사정에 아랑곳 하지 않고 일 초, 일 분, 한 시간, 하루, 일 년을 정확히 세어 나가는, 그야말로 무뚝뚝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이렇게 불친절한(?) 시간과 적(敵)이 되어서는 좋을 일이 하나도 없습니다.
오래전에 어떤 글에서 한국 초기 기독교인 가운데 다석(多夕) 유영모 선생의 일화를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분의 독창적인 신앙과 사상에 대한 여러 가지 말들이 있지만, 기인(奇人)이라고 불릴만한 재미있는 일화도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는 다석 선생이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제 나이가 올 해 60입니다.”라고 말하는 대신 “제가 오늘로써 21,901일째 살고 있습니다.”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그 분은 하루하루가 새롭고 소중하다는 자신의 이해를 그렇게 표현하면서 사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런가하면, 요즘 젊은 사람들은 세월의 빠름을 “두루마리 화장지와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처음에는 아무리 써도 표가 나지 않지만 끝날 때가 되면 정신없이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시편 90편을 보면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計數)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라는 모세의 간절한 기도가 나옵니다. 이것은 물리적인 날수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허락하신 생명과 시간을 소중하게 아끼라는 진심을 담은 권면일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모든 인생에게 생명과 시간을 주셨을 뿐만 아니라 그 모든 시간 동안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반드시 결산(決算)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벌써’ 올 해의 마지막 두 주간만을 남겨 두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이 즐겨 쓰는 ‘이미(no longer) 와 아직(not yet)’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우리는 부족함이 없는 온전한 구원을 ‘이미’ 얻었지만, ‘아직은’ 모든 것이 불완전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자들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의 영혼과 삶을 살피고, 긴장의 끈을 다시 조이는 연말이 되시기 바랍니다.
"명예(?) 회복하기!"
유진 피터슨 목사님의 책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어느 날 식당에서 음식을 앞에 놓고 홀로 식사 기도를 하고 있는데 곁에서 지켜보던 한 사람이 물었답니다. “당신 지금 뭐 하고 있는 겁니까?” 유진 피터슨 목사는 전혀 당황하지 않고 이런 멋진 대답을 합니다. “네, 잠깐 명예를 누렸습니다.”
요즘은 공공장소에서 식사 기도를 하는 사람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간혹 친구들이나 직장 동료와 함께 식당을 가게 되면 그나마 혼자 있을 때 하던 식사 기도도 눈치를 보느라 생략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물론 식사 기도의 여부를 가지고 한 사람의 신앙을 섣부르게 판단하거나, 오묘하기 짝이 없는 사람의 마음을 들여다 볼 수 있다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우리 사람들에게는 감추어도 감출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내가 무엇을 가장 중요한 가치로 삼고 살아가고 있는가?’하는 것입니다.
오래전 신앙의 선배들은 참된 신앙의 고백 때문에 목숨을 잃기도 하고,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광장에서 매를 맞기도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참된 자기 정체성이 없습니다. 자신들이 어떤 존재인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안타깝게도 자기가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려고 합니다. 눈에 보이는 많은 것을 소유하고, 누리고 있기 때문에 영혼의 공허함 마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그래서 그들의 가장 중요한 소원은 하루하루를 별 탈 없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루가 모여서 일 년을 버티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다른 자들입니다. 같은 시간과 공간 속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주신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있는 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은 무엇을 위해서 기도하십니까? 여러분 자신이 하루를 평안하게 사는 것 말고 어떤 간구를 하십니까?
하나님을 아는 것과, 예수를 믿는 자랑을 빼앗긴 채 세상 사람들과 동일한 소원과 자랑으로 살아가는 것은, 사실은 어리석은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이르시기를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너에게 비추이시리라. 그런즉 너희가 어떻게 행할지를 자세히 주의하여 지혜 없는 자 같이 하지 말고 오직 지혜 있는 자 같이 하여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오늘날 저희들은 권위를 거부하는 세상의 풍조 속에 살고 있습니다. “강요받지 않겠다.”는 것이 현대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입니다. “내가 결정하고, 내가 선택한 것에 대해서는 내가 책임을 지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성적인 관찰’만으로도 이런 일들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은 이 세상이 전부인 자들입니다. 함께 어울려서 조화롭게 살아가야 하지만, 똑같이 살 수는 없습니다.
여러분의 인생은 어떠십니까? ‘하나님의 자녀’라는 존귀함과 그 명예를 제대로 누리고 계십니까?
"모든 것이 헛되도다!"
‘빙점’이라는 소설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익숙한, 미우라 아야코라는 일본인 여류작가가 있습니다. 이분이 자서전 형식으로 쓴 ‘길은 여기에’라는 유명한 신앙 서적이 있습니다. 그 책을 보면 자신이 어떻게 예수를 믿게 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분은 인생에 대해서 ‘허무주의와 염세주의’에 휩싸여서 굉장히 혼란스러운 상태에 있다가 스스로 목숨을 포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성경을 보게 되었는데 구약성경 ‘전도서’의 한 부분이 눈에 들어와서 읽게 되었답니다. 기독교에 대해서, 진리와 절대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그녀가 처음 읽게 된 구절은 전도서에 기록된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구절이었습니다.
자기 생각에 성경이라는 책은 윤리, 도덕적으로 고상하고 교훈이 되는 이야기와 특별한 사상이 적혀 있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가지고 있던 ‘더 이상 절망할 수 없고 더 이상 허무할 수 없는’ 것보다 더 허무한 글이 쓰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 놀라게 됩니다. “기독교인들은 철저히 현실을 외면하고 자기들끼리 기쁨에 도취되어 살아가는 현실도피적인 집단인줄 알았는데, 어쩌면 이렇게 인간의 현실과 고민을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단 말인가?”
어쩌면 이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지적하고 싶어 하는 정확한 우리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기독교인들 역시,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은 이후에 성경을 통해서 우리 인간의 절망적인 모습과 아무런 소망이 없었던 상태를 비로소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되어 있는 우리 인간들이 얼마나 허무한 것과 허망한 것에 취해서 살아가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자신들이 해 아래서 수고하며, 성공과 안정을 위해서 달려가는 길의 종착역이 멸망이라는 사실을 결코 알지 못합니다.
지나간 한 해가 유난히 속상하고, 허망하게 실패한 것 같은 마음이 드는 분이 계십니까? 성경은, “하나님께 돌아오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께로 돌아와 구원을 얻고, 영원한 생명을 얻지 못하면 모든 인생이 해 아래서 수고하는 것은 정말 헛된 것이 됩니다.
이미 구원을 얻고, 이 진리를 깨달으셨습니까? 그렇다면, 멸망을 향해 달려가는 세상 사람들을 향해서 여러분의 삶으로 이것을 전하실 수 있기를 원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먼저 하는 사랑!"
미국의 한 명문대학에서 새로운 학생 휴게실을 지으면서 재미있는 실험을 했다고 합니다. 두 개의 공간으로 나누어서 한쪽은 클래식하고 품위 있게 그리고 다른 한쪽은 모던하고 세련되게 내부를 꾸몄습니다. 클래식한 휴게실은 멋스럽기는 하지만 사용하기에 조금은 불편한 면이 있었고, 모던하게 꾸민 휴게실은 전체적인 분위기가 가볍기는 하지만 사용하기에 편리한 실용적인 면이 있었다고 합니다.
얼마 후에 두 장소를 사용한 학생들에 대한 통계가 나왔는데 전체 학생 중에 90 퍼센트의 학생들이 편리한 휴게실을 사용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나머지 10퍼센트의 학생들 역시 클래식한 휴게실이 좋아서 사용한 것이 아니라 현대식 휴게실에 자리가 없어서 할 수 없이 반대편을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조금 의아로운 것은 막상 “어떤 휴게실이 좋은가?”라는 설문 조사에 대해서는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클래식하고 멋스러운 휴게실이 좋다.”라고 대답을 했다는 것입니다.
사실은 이것이 우리 모든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이율배반’적인 모습입니다. 사람들은 ‘이상과 정답’에 대한 것을 추구하기는 하지만 그것을 혜택으로 요구하지 책임으로는 생각하지 않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이상과 정답은 모두가 알고 있습니다. ‘이해와 사랑과 존중’같은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누군가가 반드시 ‘양보와 희생’을 해야 합니다. 누군가는 자존심을 꺾어야 하고, 누군가는 상대방의 말도 안 되는 억지를 참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집을 지어야 한다면 누군가는 외벽이 되어서 바깥에서 부는 찬바람을 막아야 하고, 누군가는 지붕이 되어서 쏟아지는 비를 막아야 합니다. 또 누군가는 기둥이 되어서 묵묵히 무거운 천정을 이고 있어야 합니다. 모두가 따듯한 거실에 있는 전축이 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내는 그의 서신에서 이 원리를 가르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함께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존경을 받고 싶으십니까? 먼저 존경하셔야 합니다. 사랑을 받기 원하신다면 먼저 사랑을 해야 합니다.
안타깝게도 사람들은 존경을 받기 위해 거들먹거립니다. 사랑을 받기 위해서는 교활하게 굽니다. 세상은 그렇습니다.
한 사람이 예수님께 묻습니다. “선생님, 율법 가운데 가장 큰 계명이 무엇입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명동갈비~"
오래전 신학교에서 종교철학과 조직신학을 가르치셨던 은사님께서 은퇴하신 후에 서울 외곽 한적한 곳에 자리를 잡으시고 인생 3막(?)을 시작하셨습니다. 학교에 계실 때 보다는 시간 여유가 있으셔서 이전에 하고 싶으셨던 일들을 자유롭게 하시면서 지내고 계시다고 들었습니다.
한 번은 이사로 계시는 장학회 모임이 서울에서 있어서 아침 일찍부터 서둘러 나가셨는데 모임 후에 또 다른 약속에 있어서 점심을 거르실 수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고맙게도 모임에서 어떤 분이 함께 식사하지 못하는 아쉬움에 갈비를 포장해서 드렸다고 합니다.
목사님께서는 나머지 모임을 마치신 후에 한 손에 포장된 갈비를 들고 전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시면서 점심을 거르신 허기보다는 오히려 포장 봉지 안에 들어있는 갈비 때문에 마음이 든든했고, 또 집에서 기다리시는 사모님께서 좋아하실 생각을 하니 왠지 모를 자신감(?)으로 두 다리에 기운이 나셨다고 합니다.
댁에 도착하신 목사님께서는 자랑스럽게 봉지를 건네주셨고, 포장을 열어보신 사모님께서는 “어디서 이 귀한 걸 챙겨 오셨느냐?”며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늙어도 당신 밖에 없다.”는 기분 좋은 칭찬도 덧붙이셨다고 합니다.
사모님과 함께 식사하시던 목사님의 마음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드셨다고 합니다. “아마도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해 주기 위해 다녔던 사도 바울의 기쁨이 이보다 더 크지 않았을까?”하는 것입니다.
맛있는 것을 먹는 즐거움도 참 좋은 것입니다. 그러나 잘 먹고 소화되면 그만인 ‘명동갈비’를 전하는 사람의 마음도 자랑과 기쁨이 넘쳤다면, 한 영혼을 어두움과 사망 가운데서 돌아오게 하며 절망에서 소망으로 인도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소유한 우리들의 마음은 어떠해야 하겠습니까?
‘영원한 청년’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월남 이상재 선생이 어느 날 집에 들어가니까 며느리가 재봉틀을 도둑맞았다며 낙심해서 울고 앉아 있는 모습을 보았답니다. 그때 선생은 “너는 나라를 잃고도 그렇게 울지 않더니 재봉틀을 잃고 우느냐?”라고 꾸중을 했다고 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무엇을 위해 울고, 무엇 때문에 기뻐하십니까?
새롭게 시작된 2019년에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기쁨과 예배하는 즐거움으로 그리고 생명을 살리는 복음을 전하는 뿌듯함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축복합니다.
"(Review) 하마를 용서해 주세요!"
하루가 멀다 하고 입 큰 개구리가 큰 입으로 소란을 피우며 돌아 다녔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입 큰 개구리 때문에 피해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입 큰 개구리가 말썽을 피운다는 소문이 하나님의 귀에도 들어갔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입 큰 개구리를 벌주기로 마음먹었습니다. 입 큰 개구리는 그것을 알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벌판으로 나갔습니다. 벌판 한 가운데 이르렀을 때, 입 큰 개구리는 입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무릎을 꿇어 손을 모은 후 하나님 앞에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입 큰 하마를 용서해 주세요!”
우리의 죄인 된 속성은, 문제의 원인이 나라는 사실을 언제나 반사적으로 방어하려고 합니다. 입 큰 개구리가 그 큰 입으로 소란을 피웠다는 것도 문제지만, 더 심각한 것은 문제를 일으킨 이후에 자신의 잘못을 남에게 떠넘기려는 태도가 더 문제입니다.
여러분 스스로를 잘 살펴보십시오. 다른 어떤 사람이나, 다른 누군가가 아닌 자신의 행동이나 말을 조심스럽게 돌아보십시오.
작게는 우리의 가정과 교회에서, 나아가 우리가 속한 사회 공동체 안에서 자신의 잘못과 책임을 인정하고 그 일에 대한 결과를 기꺼이 감수하는 모습을 찾아보기가 힘든 세상이 되었습니다. 비단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남을 탓하고, 핑계대고, 외면합니다.
왜냐하면, 부끄러움을 감수할 만한 실력들이 없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입을 조그맣게 오므리고 입 큰 하마를 잘못의 장본인으로 말한들, 모든 일들을 감찰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역사의 주인이신 하나님을 속일 수 있겠습니까?
예수를 믿노라 하면서도 이런 모습으로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만홀히 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바다 건너 조국 땅에서도, 나라 안팎으로도 우리의 마음을 흔드는 안타까운 소식들이 들려옵니다. 철저하게 자신을 살피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 아닌, 감사의 말과 듣는 자들에게 덕을 세우는 말을 할 수 있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소원합니다.
"공급하시는 하나님!"
우리는 구약 성경의 이스라엘 백성들을 보면서 “이보다 무지할 수는 없다.”혹은 “이보다 악할 수 없다.”라는 생각을 종종 가집니다.
‘10가지 재앙’이라는 엄청난 하나님의 능력의 간섭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구원을 얻었음에도 불구하고, 홍해를 건너 광야에 들어서자마자 원망과 불평을 하기 시작합니다. 심지어 그들은 잠시 배고파 주렸을 때에 “차라리 고기와 떡을 배불리 먹던 애굽에서 하나님의 손에 죽는 것이 나았을 것이다.”라는 엄청난 독설을 내뱉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고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 가운데 하나는, 그 많은 이스라엘 민족이 40년간 광야에서 굶어 죽지 않았다는 사실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에서 농사를 지을 수 없었습니다. 음식을 사먹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 한 사람도 광야에서 배고파 굶어 죽지 않았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40년을 통하여 그의 백성들에게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신실하신 하나님’을 가르쳐 주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병들었을 때에야 그동안 건강을 주셨던 하나님을 깨닫게 됩니다. 손을 다쳤을 때에야 비로소 손의 소중함을 알게 되고, 허리를 다쳤을 때에야 비로소 허리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이 우리들입니다.
1911년, 프랑스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그림을 도난당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모나리자가 걸려 있었던 빈자리를 구경하기 위해서 엄청난 사람들이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때때로 우리는 ‘상실’이라는 아픔을 통해서 일상에서 늘 공급하셨던 하나님을 깨닫고 비로소 감사하게 됩니다.
아침에 눈을 뜨고 일어나서 하루를 살아가는 동안 하나님께서 생명과 호흡을 공급하시고, 정신을 붙잡아 주시고, 우주 만물의 질서를 운행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생활을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에게 부족한 것이 있습니까? 어리석은 원망과 불평을 할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을 공급하시는 하나님께 오히려 감사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누구를 위해 울 것인가?"
사람들은 종종 마음속으로 이런 질문을 합니다.
“내가 죽으면 내 장례식에 찾아와서 나를 위해 울어 줄 사람이 있을까?”
그러다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내 죽음을 슬퍼할 사람들이 이렇게 없으니, 내가 인생을 헛 산 것이 아닌가? 내 인생은 실패한 인생인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히려 이렇게 물어야 합니다. “누가 죽으면 내게 눈물이 날까? 누구의 죽음 소식에 내 마음이 견딜 수 없이 아플까?”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훨씬 행복합니다. 사랑을 받는 것보다 사랑을 하는 것이 더 큰 자랑입니다. 짐을 남에게 지우고 걸어가는 것이 높은 것이 아니고, 남의 짐을 내가 지고 가는 것, 그것이 정말 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누구의 죽음이 여러분을 가장 슬프게 할 것 같습니까? 부모님입니까? 자녀들입니까? 아니면 배우자입니까?
부모님과 자녀들 혹은 배우자의 죽음이 여러분을 가장 슬프게 하는 이유는, 여러분의 사랑을 그들에게 쏟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뜻밖의 요구를 우리들에게 말씀합니다. 나에게 못되게 구는 자, 내게 가시 같은 원수까지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것도 여러분의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 이유를 “하나님의 사랑으로 말미암아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셨기 때문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 주신 것은, 우리를 향한 가슴 아프고 견딜 수 없는 안타까움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죄와 사망의 고통 가운데 있는 우리를 그냥 내버려 두실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이 세상 무엇보다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사람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마음을 안타깝게 하고, 여러분의 가슴을 졸이게 만드는 대상이 있으십니까?
바울 사도는 “누가 약하면 내가 약하지 아니하며 누가 실족하면 내가 애타하지 않더냐”라는 고백을 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이 마음을 가지셔야 합니다. 그리고 그들을 위해 하나님께 기도하셔야 합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그 영혼에 은혜를 부어 주시기 전에는 제가 잠을 잘 수 없습니다.”
"약장수 때문에(?)"
제가 아는 집사님 중에 한 분이 고등학교를 제때 졸업하지 못하신 분이 있었습니다. 전쟁 통에 학교를 다니신 분도 아닌데 자기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것을 ‘어느 약장수’ 때문이라고 늘 핑계를 대십니다.
학창 시절, 학교 가는 길에 약장수 한 사람이 있었는데 뱀을 한 마리 가지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그 약장수 말이 “뱀이 줄을 타고 춤을 추는 묘기를 부린다.”고 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이 집사님께서 그 뱀이 부리는 묘기를 보기 위해서 고등학교 3학년 내내 학교를 제대로 다니지 못했다고 합니다.
“이제 곧 뱀이 줄을 타는 묘기를 보여 주겠다.”고 해 놓고 이상한 약을 팔고, 또 “이제는 정말 뱀이 춤을 추는 묘기를 보여 주겠다.”고 해 놓고 점심 식사를 하러 간 것이 일 년이라는 세월이 지나갔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호기심이 발동을 했으면 고등학교 3학년 그 중요한 시기에 약장수를 따라 다녔을까?”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지만, 그 이야기를 듣는 사람들은 누구라도 ‘분별없었던 과거에 대한 부질없는 핑계’라는 것을 잘 압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생활 동안 마땅히 깨우쳐야 하고, 마땅히 바른 선택을 해야 하는 많은 일들에 대해서 반복하여 실패하고 또 핑계를 대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기적과 은혜 속에 있으면서도 부질없고, 사소한 것으로 인해 원망과 불평을 멈추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자주, 너무나 뻔한 것에 실패하곤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뻔한 핑계를 댑니다. “그 약장수 때문이다.”라고 말입니다.
학생으로, 선생으로, 자녀로, 부모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에게는 성실하게 감당해야할 책임들이 있습니다. 잘하고 못하고는 사실 두 번째 문제입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자리에서 ‘빛과 소금’으로 살아가야하는 중요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은 정죄하거나 파괴하는 직분이 아니라 소망을 전하고 사람을 살리는 직분입니다. 또한 우리가 맡은 직분은 이 세상뿐만 아니라 장차 올 영원한 세상에 까지 유익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약장수 때문에...”라는 핑계를 대지 않도록, 기회 있는 대로 복음을 전하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입양(1)"
한 번도 가보지 않은 길을 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길을 잃을 수도 있고 예상치 못한 어려움을 만날 수도 있습니다. 사람도 없고 집도 없는 광야나, 아주 깊은 산길을 가다가 자칫 길을 잃으면 고립 되어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 저도 어렸을 때 외할머니 댁에서 돌아오다가 산에서 길을 잃는 바람에 한 밤 중에 몇 시간을 고생한 기억이 있습니다.
높고 험한 산을 등산할 때에는 누가 안내자가 되느냐가 매우 중요합니다. 특별히 인생길에서의 안내자는 더욱 중요합니다. 사실 우리들에게 부모님 보다 더 나은 안내자는 없습니다.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사시면서 많은 것을 경험했을 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기를 원하는 훌륭한 인생길의 안내자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아이를 키우는 것만 해도 어려운데 다른 사람이 낳은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존경스러운 분들입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심한 장애를 가진 아이를 입양해서 키우는 분들도 있습니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 특별히 남의 아이를 입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한 평생을 책임진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엄청난 희생을 각오해야 하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들도 장애가 있는 한국 아이들을 입양해 키우면서 어려운 문제들을 극복해 나가고 있습니다. 자라면서 심각하게 반항할 때도 있었고, 자신들의 처지를 비관해서 탈선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비슷한 처지의 아이들끼리 아시안 갱단을 만들어서 큰 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아이들 문제 때문에 잠도 잘 자지 못하고, 밥도 잘 먹지 못했다는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런데 성경을 보면 저와 여러분들을 ‘양자(養子)’라고 부릅니다. “아니, 우리 부모님들이 멀쩡하게 살아계시고 나도 잘 살고 있는데?”라고 생각하실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 모두는 죄로 얼룩져 하나님과 분리되어 사망 가운데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대속을 위해 십자가에 내어 주시고 우리를 자녀(양자)삼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 않고, 우리의 이해와 인식의 범주를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음 주 계속...)
"입양(2)"
사실 우리들은 죄와 사망의 노예 된 상태에서 자유를 얻은 것이 얼마나 귀하고 값진 것인지 다 이해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눈에 보이지도 않고, 우리의 인식과 이해의 범주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래전 신문보도에 북한 탈북자들이 중국에서 붙들려 다시 송환 된 기사가 났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탈북자들이 붙잡히면 철사로 코를 꿰어서 잡아간다는 것입니다. 북한 당국은 주민들을 그들의 노예로 생각하고 있는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사람의 코를 철사로 꿰어서 짐승처럼 끌고 갈 수 있겠습니까? 어쩌면 죄와 사망의 노예 된 형편은 탈북자들의 형편보다 더 비참하고 소망이 없는 처지일 것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죄와 사망의 쇠사슬”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도 자신들이 무서운 속박아래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어느 누구도 자신들이 노예의 신분이라고 생각지 않을 것입니다.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에서 노예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크신 사랑과 권능으로 저들을 구속하셨습니다. 애굽 왕 바로가 마음을 강퍅하게 하며 고집을 피웠고, 이스라엘 백성들조차도 온갖 불평과 원망을 쏟아 내었지만 하나님께서는 결코 포기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바로, 하나님의 백성으로 부르시는 모든 자들의 처지가 이와 같음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입니다. 열 가지 재앙과 유월절 어린양의 피 흘림과 홍해를 마른 땅 같이 건너도록 하신 것은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베풀어 진 것입니다. 아니, 양과 염소의 피가 아닌 성자 하나님이신 예수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사망의 노예에서 구속함을 얻은 것입니다.
이렇게 구속하신 그의 백성, 그의 자녀들을 하나님께서는 끝까지 책임지십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자기가 낳은 자녀들을 무책임하게 버리거나, 입양했던 아이들을 남의 손에 넘길 때가 있지만, 우리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제가 신학교를 다니던 시절에 교육 전도사로 섬겼던 교회의 담임 목사님께서는 새벽 예배를 마치고 항상 근처에 있는 국민학교 운동장을 찾아가서 운동을 하셨습니다. 요즘말로 하자면 ‘자기관리’를 나름대로 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교회에서 학교까지 20분 정도 걸어가시는 동안 ‘운동복을 안에 입고 바깥에는 양복에 넥타이를 매고’ 다니셨다는 겁니다. 계절이 바뀌고 날씨가 바뀌어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변함없이 그렇게 입고 다니셨습니다. 나중에 그 이유를 알고 보니까, 혹시라도 사람들이 보고 ‘이런 저런 말꺼리가 될까봐’ 아예 불편한 쪽을 택한 것입니다.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이 자유로워진 세상이 되었지만, 특정한 집단이나 특정한 대상에게 여전히 완고한 윤리와 엄격한 도덕적인 기준이 요구될 때가 있습니다. 물론 정당하게 필요한 경우가 분명히 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내가 아니라 너’이기 때문에 무조건적으로 강요될 때가 많습니다. 어떤 분의 이야기처럼 “내가 하면 그럴만한 이유가 있고, 남이하면 나쁜 짓”이라고 몰아 부치는 ‘내로남불(?)’의 고약한 심보일 때가 많습니다.
Nathaniel Hawthorne 이라는 분이 쓴 ‘주홍글씨’라는 책을 보면 교회에 사람들이 모여서 “저 사람은 악령이 씌었다!”라고 정죄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그렇게 외치면, 다른 사람들은 “나도 봤습니다.” “맞습니다. 나도 저 사람이 주문을 외우는 것을 봤습니다.”라고 이야기를 하고 데려다가 불에 태워서 죽입니다. 멀쩡한 사람들이 억울하게 죽어나갔고, 그것이 그들의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런 일들이 일어난 때가 우리들이 ‘청교도 시대’라고 불렀던 당시의 이야기라는 것입니다. 소위 ‘신앙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복음의 근본을 지키자’는 것이 청교도시대의 가장 큰 명분이었습니다.
감히 청교도 시대 전체를 평가하거나 점수를 매기자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는 죄가 얼마나 은밀하고, 집요한가를 알아야 합니다. 겉으로 드러나야만 더 혼란스럽고 추악한 것이 아니라, 감추어져 있을 때에도 마찬가지이며 오히려 치명적일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신약성경을 보면, 산상수훈에 예수님께서 ‘많은 사람 앞에 보이려고 구제하고, 기도하고, 금식하면서 그 마음에 여전히 품고 있는 죄’에 대해서 경고하십니다. 여러분의 마음을 살피십시요.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그럴듯한 외모가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뭣이 중한디? 뭣이?"
한국을 떠나서 미국 땅에 산 세월이 수 십 년을 넘어가도 조국 땅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쉽게 사그라지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정치적인 문제는 차치하고라도, 크고 작은 사건이나 이런 저런 소식에 따라 우리들의 마음이 기쁘기도 하고 때로는 불편해지기도 합니다.
어느 역사학자 한 분이 우리나라(한국) 사람들을 ‘비나이다 문화가 뿌리 깊이 자리를 잡고 있는 민족’이라고 표현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도 그럴 것이 가까운 역사만 거슬러 올라가 봐도 고려는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조선은 ‘유교’를 그리고 놀랍게도 대한민국은 ‘기독교’를 건국이념으로 해서 나라의 기초를 세웠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물론 유교를 종교라고 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문제는 조금 복잡합니다만, 학문이나 사상이라는 측면이 많은 비중을 차지하지만, 조상 숭배와 샤머니즘의 내용도 분명히 있습니다.
미국에 살고 있지만 한국 사람들에게서 쉽게 지울 수 없는 것 중에 하나는 유교적인 사고방식과 행동 윤리가 아닌가 싶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을 하나 꼽으면 ‘명분’을 참 좋아한다는 것입니다. 사실 명분이라는 것은 참 모호한 개념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이것이 빠지면 무게가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어떤 ‘명분’을 분명한 내용으로 뒷받침 하지 못하면 언제나 ‘정성’이라는 치열함으로만 그 명분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정성’의 가치를 깎아 내리려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진지함과 열심은 그것 자체만으로도 귀한 것입니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의 정서 속에는 지나칠 만큼 ‘지극정성’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민족뿐만 아니라 모든 샤머니즘에는 ‘진리’가 내용을 채우지 못하고 언제나 ‘치성(致誠)’이 우선으로 요구되는 것입니다.
이런 유교적인 배경으로 기독교 신앙과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내용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역’을 이해하려고 든다면, ‘놀라운 하나님의 작정과 섭리’는 놓쳐 버리고 말 그대로 ‘신파’만 남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 할 때, 하나님과 단절된 인간이 처해있던 죄와 사망에 대한 비참함을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의 고통이 얼마나 심하셨을까?” 하는 짠(?)한 마음만 되풀이 되는 것입니다.
사순절 기간을 지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허락된 구원의 중요한 은혜를 기억하며 하나님께 진정한 감사를 드립시다.
"하나님과 충돌 하시렵니까?"
예전에 이런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아프리카에 철도가 놓이던 초창기에 코끼리 한 마리가 기차와 정면충돌을 했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코끼리는 지금까지 어떤 동물을 피해서도 도망간 일이 없었기 때문에 자신을 향해 비키라고 기적을 울리며 달려오는 기차와 정면충돌을 결심 했다는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였습니다. 물론 이것은 실제 일어난 어떤 사고를 자의적으로 재미있게 해석한 이야기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위를 조심스럽게 살펴보면 이 코끼리와 같이 무모한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얼마나 크신 분인지를 깨닫지 못하고 하나님과 충돌하려고 하는 사람들입니다. 심지어 세상은 이런 사람들을 “용기 있다.” 혹은 “배짱이 좋다.”라는 말로 부추기기까지 합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이런 사람은 분별력이 없는 것입니다.
벌써 3월의 마지막 주간을 맞게 되었습니다. 여러분은 이미 올해의 소원과 계획들을 세워서 열심히 지켜나가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어쩌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기대하는 것으로 답을 주시지 않을 수도 있고, 때로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길로 인도하실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원하고 욕심내는 대로 내버려두셨다가는 하나님께서 목적하시는 그 영광되고 거룩한 자리에 갈 수가 없기 때문일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줄에 묶어 움직이는 꼭두각시 인형처럼 취급하지는 않으실 것입니다. 그러나 필요하시다면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의 의지와 충돌하실 것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인생을 살아오시면서 큰 어려움 없이 지내오신 분이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큰 복입니다. 또한 어떤 분은 말로 표현 못할 엄청난 사건들을 겪으셨다면 그것 또한 감사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 욕심과 내 뜻대로 내어버려두지 않으셨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 충돌하시렵니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남은 인생을 참다운 믿음의 안목과 분별력으로 살아가야 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1)"
대부분의 사람들이 예외 없이 가지고 있는 특징 가운데 몇 가지를 꼽으라고 하면 ‘비교의식’과 ‘모방성(模倣性)’ 이 아닐까 싶습니다. 이 중에서도 모방성은 아주 심각한 위기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좋은 의도를 가지고 누군가를 따라하는 경우도 있지만, ‘모방범죄’라는 무서운 모습으로 왜곡되기도 합니다.
‘유행’이라는 모양으로 나타나는 모방성은 좋은 장점들도 있는가 하면, ‘획일성’이라는 모습으로 나타나는 모방성의 문제는 산업혁명 이후에 인류가 풀어야할 큰 과제가 되어 있다고 전문가들은 이야기 합니다.
옷 입는 스타일이나 색깔, 옷감도 유행을 따라 바뀌는 것 같습니다. 여자들뿐만 아니라 남자들의 옷차림도 시대에 따른 유행의 흐름이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 혼자만 남들과 다르게 하면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초조한 마음에 아무 생각 없이 덩달아 유행을 따라가는 것은 사실 미련한 짓입니다. 유행을 읽으면서 자신만의 개성을 갖는다면 좋은 일이지만, ‘무조건적인 따라 하기’는 오히려 그 사람을 초라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인들의 신앙생활도 여러 가지 유행에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묵묵하게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들도 다른 사람들이 별로 열심을 내지 않으면 본인도 덩달아서 태만하기 쉽습니다. 특별히 ‘원망과 불평’이라는 유행은 하는 이로 하여금 묘한 매력까지 느끼게 하는 전염성이 강한 죄악입니다. 특히 신앙생활을 하는 신자들에게 있어서 더욱 그렇습니다. 좋은 것을 본받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반면, 나쁜 것을 본받기는 그야말로 순식간이라는 사실을 아이들을 키워본 부모들이라면 모두가 경험으로 잘 알고 있습니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어느 교회나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선하고 좋은 면도 나타나지만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한 면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분별없이 따라하게 된다면 본인은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유행이나 흐름을 분별없이 따라하게 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2)"
교회는 하나님의 성전이지만 불완전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이므로 어느 교회나 완전할 수는 없습니다. 선하고 좋은 면도 나타나지만 부족하고 성숙하지 못한 모습들도 있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다른 사람이 하는 것을 분별없이 따라하게 된다면 본인은 물론, 가정이나 교회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구나 교회가 세상의 잘못된 유행이나 흐름을 분별없이 따라하게 된다면 그것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부정적인 요소가 너무나 강하고 빠르게 사람들에게 전달이 됩니다. 서로가 서로에게 상처를 입을까봐 마음을 잘 열지 않는 ‘개인주의’ 성향이나, 내 남편 내 자녀만 잘 되면 그만이라는 ‘이기주의’ 같은 유행이 사회와 가정을 흔들고 있습니다.
성경은 이미 이러한 시대의 풍조를 향해 경고하고 있습니다. “너는 이것을 알라 말세에 고통 하는 때가 이르러 사람들이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랑하며 교만하며 비방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감사하지 아니하며 거룩하지 아니하며 무정하며 원통함을 풀지 아니하며 모함하며 절제하지 못하며 사나우며 선한 것을 좋아하지 아니하며 배신하며 조급하며 자만하며 쾌락을 사랑하기를 하나님 사랑하는 것보다 더하며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의 능력은 부인하니 이 같은 자들에게서 네가 돌아서라”
사실 이 모든 것들은 이미 우리에게 낯선 것들이 아닙니다. 종종 그리스도인들 가운데서도 이런 풍조들을 좇아가지 않으면 ‘나만 손해(?) 볼 것 같은 마음’으로 불안해하는 분들도 있습니다. “왜 저 사람은 자랑하고 교만하고 무정하고 싸나운데, 나만 온유하고 겸손하고 오래 참아야 합니까?”하는 반발도 있을 수 있습니다. 어쩌면 이 세상과 내 인생에 반전이 일어날 가능성이 없다는 좌절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의 자녀 된 우리에게 이 세대의 풍조를 분별하는 지혜를 가지라고 권면하십니다.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가변적이고 정함이 없는 세상의 물결에 여러분을 내어 맡기지 마시고, 세상이 주는 잠깐의 즐거움 때문에 영원한 기쁨을 외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잘 살고 계십니까?"
‘만유인력’이라는 중력법칙이 있습니다. “모든 질량(무게)을 가진 물체는 그것을 잡아당기는 중력에 이끌린다.”는 원리입니다. 아주 쉬운 예로 돌멩이를 손에서 놓으면 땅으로 떨어지게 되어 있는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원리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돌 자체가 중력이라는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돌은 그냥 ’중력‘이라는 법칙에 순응한다는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예외 없이 ‘돌은 그래야 한다.’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특별한 이유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만약 돌을 손에서 놓았는데 아래로 떨어지지 않고 위로 올라간다면, 무언가 잘못 된 것입니다.
구약성경 시편을 보면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 궁창이 그 손으로 하신 일을 나타내는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지으신 모든 만물들이 하나님의 지으신 뜻과 법칙에 순응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인간은 창조주 하나님을 알며, 그 명령을 듣고도 순응하지 않는 유일한 피조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생각을 좀 해보십시다. 하나님께서 인류를 향해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그의 법을 따라 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인간만은, 옳은 것을 아는데 그것을 지키지 않는 이상한 법칙(?) 속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물론 이것은 인간이 하나님의 법칙을 거스를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차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의 불순종과 거역을 허락하신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반역과 불순종의 시간들을 기다려 주시면서, 그 속에서 자신들의 무력함과 불완전함을 깨닫고 하나님께로 돌아오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와 하나님의 긍휼이라는 것이 어떻게 유일한 소망이며, 살 길인지를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우리들에게 ‘눈물과 한숨’도 허락하시고, 필요하다면 ‘실패와 실수’까지도 용납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하나님이 정하신 질서와 순리를 따라 살지 말고, 그것을 거슬러서 우리의 욕망과 인간이 가진 자유(?)함을 마음껏 누리며 살라고 우리를 충동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허락된 자유는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며, 그 안에 있을 때 진정한 가치를 가지게 될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은, 무엇을 따라 살고 계십니까?
"하나님의 은혜!"
우리가 기독교에 대해서 믿지 않는 사람들과 대화를 하다보면 가장 답답한 것이 “이렇게 분명하고, 이렇게 확실한데 왜 믿지 않는 것일까?” 하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답답한 것은 없을 것입니다.
비교가 정확치는 않지만 오래전 이런 일이 있었습니다. 남북한이 서로 사절단을 파견해서 남한과 북한을 둘러보기로 한 것입니다.
그때 남한에서는 “이북 사람들이 남한에 와서 실상을 보기만 하면 경제적인 풍요로움과 자유에 반해서 항복할 것이다.”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그들이 와서 보고 남긴 말은 “복잡하고, 공기가 나빠서 도저히 못살겠다.”였다고 합니다.
이북 사람들 역시 이런 기대를 가졌을 것입니다. “남한 사람들이 북한에 와서 보기만 하면 맑은 공기와 일사불란함에 반해서 항복할 것이다.”
그런데 역시 북한을 다녀온 사절단의 이야기는 한 마디로 “숨이 막힐 것 같았다.”였습니다. 명령과 감시 속에서 살고 있는 북한 사람들의 모든 일상이 숨이 막힐 것 같았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역시 “내가 믿고 확신하는 이 기독교 진리를 누구든지 듣기만 하면 깜짝 놀라며 받아들일 것이다.”라는 기대를 가집니다. 그러나 현실은 기대했던 것과는 달리 실망 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구원을 얻는 것이 설명과 이해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 성가 가운데 ‘하나님의 은혜’라는 제목의 찬양곡이 있습니다.
“나를 지으신 이가 하나님, 나를 부르신 이가 하나님, 나의 나 된 것은 다 하나님 은혜라.
한량없는 은혜, 갚을 길 없는 은혜, 내 삶을 에워싸는 하나님의 은혜”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이 우리가 믿고, 기뻐하며, 확신하고, 소망을 가질 수 있는 이 모든 것은 다 하나님의 은혜인 것입니다.
하나님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해서 우리는 안타까운 마음을 가질 수는 있지만 답답해 할 수는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문적인 배경도, 지식의 수준도, 살아온 환경도, 그 어떤 것도 이 복음을 깨닫고 믿는 일에는 전혀 조건이 될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도 바울을 택하신 것과 같이, 바로 당신을 택하신 것입니다.
이 일에는 차별도, 자랑도, 비교도, 우월감도 있을 수 없습니다. 오로지 감사만 있을 뿐입니다.
"핑계대지 말고!"
사람은 어느 누구도 단 한 번에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거나, 시인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처음에는 부인하고 그래도 상황이 여의치 않으면 그렇게 밖에 할 수 없었던 상황을 핑계로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당연히 죄에 대하여 자기 정당화를 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변명이 따라 올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통한다는 생각이 들면 교만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죄는 언제나 같은 죄를 지은 사람을 찾는다.’는 것입니다. 죄인들끼리 뭉치며 죄의 세력을 넓혀갑니다. 왜냐하면, 여기저기서 죄인을 볼 때마다 자신의 죄가 죄처럼 여겨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거기에다가 자신보다 더 큰 죄를 지은 사람을 만나면 금상첨화입니다. 아주 쉬운 예를 들면 이런 것입니다. 우리들 중에 누군가 예배시간에 늦게 들어왔다고 가정을 합시다. 주변 사람들에게 미안합니다. 하나님께도 죄송합니다. 그리고 후회합니다. “조금만 일찍 서둘렀더라면…” 하고 머릿속에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그 순간 자신처럼 늦게 들어오는 사람을 보면 죄책감은 순식간에 줄어듭니다. “나 말고도 늦는 사람이 있구나!”
그런데 늦게 들어온 사람이 권사님이나 장로님쯤 되면 상당히 기분이 좋아집니다. 반갑습니다. 왜냐하면, 자기 행위를 정당화할 구실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문제는, 예배 시간에 조금 늦게 왔다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죄의 패턴이 우리가 살고 있는 모든 영역에서 적용된다는 것입니다. 죄는 언제든지 정당화 할 수 있어서 무서운 것입니다.
그래서 죄를 지은 사람들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다른 사람의 잘못한 이야기하기를 즐긴다는 것입니다. 아니 숨겨진 남의 죄를 들춰내는 것을 좋아합니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의 성도들에게 보낸 편지를 보면 이 문제를 책망하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잘못이 처리되지 못한 죄의 문제입니다. 고백하지 않고 잘 숨겨진 죄의 문제가 교만으로 이어지고, 자신을 정당화하다 보니 자꾸 다른 사람을 비방하고 헐뜯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어떤 경우에도 아주 작은 죄까지 무섭게 다룹니다. 심지어 “죄는 모든 모양까지라도 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물론 천국은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아무런 실수나 흠이 없어야 들어갈 수 있는 곳은 아닙니다. 아니, 누구도 죄를 짓지 않고 인생을 살수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죄를 대하는 우리의 태도입니다. 우리의 연약함을 아시는 하나님 앞에 망설이거나 핑계대지 말고, 회개하고 돌이킬 수 있기를 바랍니다.
"왜 성경에 나쁜 이야기가?"
많은 사람들이 성경을 읽다가 이런 질문을 해 옵니다.
“왜 거룩해야 할 성경(聖經)에 죄 짓는 이야기들이 더 많습니까?”
사실 성경에는 사람들의 온갖 추한 모양의 범죄들이 자주 등장합니다. 인류 최초의 사람인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의 금지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 먹는 것을 시작으로, 가인이 자신의 친동생을 쳐 죽이는 사건, 야곱이 형과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권리를 빼앗는 사건, 어린 동생을 노예로 팔아 버리는 사건, 나라를 구한 영웅 다윗을 시기하여 죽이려는 사울왕의 이야기, 그 영웅 다윗이 왕이 되어 남의 아내를 빼앗고 그 부끄러운 일을 감추기 위해 살인을 사주(使嗾)한 이야기, 누구보다 신실해야 할 하나님의 선지자가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도망가는 이야기...
왜 성경은 이 보다 더 많은 죄들을 적나라하게 기록하고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성경이 이 세상의 어떤 책 보다 우리 사람들의 상태를 정확하게 말해주고 있는 책이기 때문입니다. 지나간 과거에 어떤 사람들이 저지른 잘못을 나열하고 있는 정도가 아니라, 우리가 누구인지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인류는 하나님과의 첫 약속을 깨뜨림으로 말미암아 죄를 불러들였고,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가 되었습니다. 성경은 이것을 ‘죽음’이라고 표현합니다.
하나님과의 단절은 마치 전기와 수도가 끊어진 집과 같습니다. 냉장고 안에 있는 음식은 시간이 흐를수록 부패할 수밖에 없고, 화장실 변기의 오물은 쌓여 악취를 풍길 것입니다. 사람은 죄를 지음으로 죄인이 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단절된 죄인이기 때문에 죄를 지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성경이 고발하고 있는 범죄들은 그들 개인의 문제를 넘어 하나님과 단절된 모든 인류의 상태를 말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과 단절된 상태의 심각성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살아있는 사람의 몸도 혈액이 공급되지 않는 부분은 수 일 내에 썩어 구더기가 생깁니다.
성경은 영원히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 인류의 죄악 된 상태만 지적하는 것이 아니라, 단절 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킬 수 있는 유일 한 길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바나나 좋아하세요?"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한국에서 바나나는 제법 비싼 과일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물론 그 이전 60년대에는 부잣집 도련님, 공주님들이나 겨우 맛을 볼 수 있을 만큼 고가의 과일이었다고 합니다.
어느 신문 기사를 보면 1970년 당시 버스 요금이 10원, 짜장면이 100원일 때, 바나나 낱개 하나가 500원에서 1000원 사이에 판매가 되었다고 합니다. 어린이들이 가장 먹고 싶어 하는 과일 중에 하나였고, 어쩌다가 한 번 맛을 보기라도 하면 “바나나가 열리는 나라에 가서 실컷 먹어 보는 것이 소원이다.”라고 이야기를 할 정도였습니다.
구약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의 노예 생활에서 해방되어 광야를 지나 약속의 땅 가나안 앞에 이릅니다. 그리고 그들은 열 두 명의 정탐꾼을 보내서 그곳이 어떤 곳인지를 탐지하도록 합니다.
드디어 정탐꾼들이 가나안 땅을 돌아보고 그곳의 포도 열매를 증거로 가지고 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그 포도가 얼마나 큰지, 한 송이를 나무 작대기에 끼워서 두 사람이 들고 왔습니다.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비옥한 땅이었던 것입니다. 그 포도송이를 보면서 사람들은 약속의 땅이 어떤 곳인지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야 40년 동안 아무것도 심을 수 없고, 거둘 수도 없는 곳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만나’를 먹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 지면에 쌓였고 아침마다 그것을 거두어서 양식을 삼았습니다. 사람들은 “이것이 무엇이냐?”라고 서로 물었고, ‘만나’라는 이름의 뜻이 바로 “이것이 무엇이냐?”라는 말에서 나온 것입니다.
어쩌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내려 주시는 ‘만나’를 먹으면서,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나라와 새로운 세상이 있을 것이라는 소망을 가졌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 유대인들은 ‘하늘로써 오는 표적’을 구합니다. 아마도 그들은 그 옛날 자기 조상들이 모세와 함께 먹었던 ‘만나’를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만나가 크냐 만나를 만드신 주인이 크냐?”라는 질문을 하십니다. 그리고 만나가 아니라, 자신을 “하늘로써 오신 생명의 양식”이라고 친히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이 세상에 살고 있지만 이 땅이 영원한 곳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약속하신 그 나라를 소망합니다.
"사색이 되어간다~"
대학시절 화장실에서 이런 낙서를 읽어 본 적이 있습니다. 여러분도 한 번쯤 들어 보셨을 우스갯소리입니다.
“기억하라. 당신이 사색에 빠져 있는 동안, 밖에 있는 사람들은 사색이 되어간다.” 물론 누군가가 웃자고 쓴 낙서입니다만 한편으로는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마음에 대해 충고하는 글이기도 합니다. 한 사람의 이기심이 때로는 여러 사람들을 어려움으로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사실을 늘 기억해야 합니다.
예수님 당시에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종교적인 독단주의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종교적 독단주의란, 자신이 배우거나 경험해서 가지고 있는 신앙의 내용이나 형태를 절대화 시켜서, “다른 사람들도 나와 똑같이 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생각을 일컫는 말입니다.
물론 개인이 경험한 신앙의 특별한 체험은 소중한 것이고, 그것 자체로는 나무랄 이유가 없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에게 은혜가 되었던 어떤 종교의식과 체험을 일반화 시키고, 절대화 시킨다면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이 빠졌던 실수를 반복하게 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가졌던 대표적인 독단주의는 금식에 관한 것과 안식일에 대한 생각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금식 자체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나 자신들만의 규칙과 틀을 만들고 사람들에게 보이기 위한 목적으로 금식하는 바리새인들에 대해서는 책망하셨습니다.
안식일도 마찬가지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안식일에 지켜야할 234가지의 세부 규칙을 만들어서 스스로를 얽어맬 뿐 아니라, 그것을 따르지 않는 다른 사람들도 정죄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일들에 대해서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있지 않고,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있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계명과 율법은 하나님께서 그의 사랑하는 자녀들을 복되게 하기 위해 주신 것이지 그 계명을 지키는 것에 목숨을 걸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물론, 분명히 이 말을 핑계 삼을 분들이 있을 줄 압니다만 그 사람의 수준의 문제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주일예배를 드리고, 항상 기도하고, 말씀을 따라 살기 위해 열심을 내는 것은 ‘다만 지켜야할 계명’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기뻐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행하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